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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만난 순교자 2026-10-27

10월 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은 평일인데도 가을 정취를 즐기려는 행락객들로 붐볐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에 나선 사람들 사이로 한 손에 묵주를 쥔 채 걷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수원교구 남한산성성지를 찾은 순례자들이다.

수원교구는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기도할 수 있도록 2011년 교구 내 성지와 사적지를 연결한 도보성지순례길인 ‘디딤길’을 조성했다. 총길이 약 410㎞에 이르는 디딤길은 순례자들이 직접 걸으며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하고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도록 마련한 길이다. 그중 남한산성성지에서 구산성지까지 이어지는 제4코스는 수많은 순교자가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흔적이 남아 있다.

구산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성 김성우 안토니오의 형제와 아들 가운데 여러 명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옥고를 치르거나 순교했다.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이들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고향 구산으로 돌아와 묻혔다. 이 길은 두 성지가 간직한 순교 역사를 하나로 잇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잘 닦인 남한산성 둘레길을 뒤로하고 디딤길 순례책자가 안내하는 길로 들어섰다. 북적였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발밑으로 돌과 흙이 뒤섞인 거친 길이 나타났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질 때마다 발걸음은 무거워졌다. 거친 산길을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감내했던 순교자들의 삶이 떠올랐다.

같은 가을 산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단풍을 즐기는 산책길이고, 누군가에게는 순교자의 삶을 묵상하는 기도의 길이 됐다. 길 위에서 마주한 순교자들의 삶은 지금 우리의 신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조용히 묻고 있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가톨릭신문 2026-10-27 오후 4:52:46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