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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폭력에 물든 인간, ‘자비의 하느님’을 전쟁에 끼워 맞췄다 2026-04-14
미국은 2월 28일 ‘장대한 분노’ 작전으로 이란을 대규모 공습한 이후 때마다 자신들의 전쟁 정당성을 위해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교회는 이에 “전쟁에 하느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죄에 해당한다”고 비판했지만, 미 정부는 멈추지 않고 있다. 아울러 전쟁 후 현재 세계 원유 수송의 약 20%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유조선들의 발이 묶인 상황이다. 12일 기준 해협에 머물고 있는 우리나라 선박은 26척, 선원은 173명에 이른다. 본지는 전쟁을 둘러싼 미 정부의 잘못된 발언에 대한 주교의 기고와 평소 선원들을 위해 사목해온 사제의 글을 통해 전쟁을 향한 어긋난 진실과 이면의 고통을 돌아봤다.

정리=박민규·박예슬 기자



2026년 3월 10일 미국 전쟁부 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기자단 브리핑에서 구약 성경의 시편을 근거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촉발된 전쟁을 정당화했다. 그는 시편 144편 1절에서 “나의 반석이신 주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내 손에 전투를, 내 손가락에 전쟁을 가르치시는 분”이란 표현을 인용했다.

그러자 예루살렘 라틴총대주교 피에르 바티스타 피자발라 추기경은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중대한 죄에 속한다”라고 반박하면서 “하느님은 분쟁 속에 고통받고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계시지, 종교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이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3월 25일에도 헤그세스는 공개적인 기도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총알이 적에게 명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레오 14세 교황은 3월 2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강론에서 “피 묻은 손으로 올리는 기도는 하느님이 거절하신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며 전쟁을 거부하신다”라고 응대하셨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지난 3월 기자단 브리핑에서 시편 구절을 인용해 전쟁 발발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OSV


성경을 잘 살펴보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의 배경에는 구약과 신약 성경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내용과 신약 성경의 내용이 서로 대립할 때 어느 쪽을 따라야 할까?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모두 하느님을 계시하는 책이지만, 구약은 약속이고, 신약은 그 약속의 실현이다. 계시의 정점은 신약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정점을 근거로 성경의 다른 내용들을 해석하는 것이 가톨릭의 전통적 성경 해석 원칙이다. 이런 원칙에 따르면, 신약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으로 비폭력의 하느님을 선포하시고, 자신도 철저히 비폭력의 삶을 사셨기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면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폭력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로운 모습이다가도 어떤 때는 폭력적이고 피를 요구하는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부조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성경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느님이 그 내용을 불러주시고 인간이 그 말씀을 듣고 쓴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인 동시에 인간의 글이다. 말하자면 성경은 그 시대 인간의 문화와 생각을 바탕으로 쓰인 글로서 그 속에서 하느님의 본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런 전제하에 ‘라이문트 슈바거’라는 가톨릭 신학자(스위스 태생 예수회 소속 인스브루크 신학대학 교수, 1935~2004)는 성경에 드러난 하느님의 ‘폭력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폭력성

인간에게는 폭력성이 내재해 있는데, 이것을 하느님께 투사시키고는 했다. 인간 자신이 폭력에 물들어 있어서 폭력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았고, 그래서 하느님 역시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분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서서히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자비로운 하느님과 폭력적인 하느님 모습이 혼재해 있다. 이런 불명확함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끝이 난다. 예수님은 명시적으로 폭력에 폭력으로 맞대항하지 말라고 하셨고(마태 5,38-42 참조),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아버지 하느님을 선포하면서, 이를 근거로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태 5,43-48 참조) 또한 그분은 체포되는 순간에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를 만류하시면서 폭력을 거부하신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십자가상에서는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청하셨다.(루카 23,34 참조) (참조 : 손희송,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하느님’,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가톨릭대학교출판부, 15~42쪽)

미국의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들 구미에 맞는 구절을 신약과 구약 가리지 않고 뽑아내어 자기 이익에 맞게 해석하고는 한다. 그러나 말과 행동으로 철저히 비폭력을 추구하셨던 예수님을 하느님 계시의 절정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약 성경의 일부 대목을 근거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3월 19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자신들이 시작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덕적 우위만으로는 무자비한 적을 맞설 수 없다고 하면서, 역사학자 윌 듀런트(Will Durant)를 인용하여 “역사는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칭기즈칸보다 우위에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이기에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그렇게 막강했던 칭기즈칸의 제국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에 반해서 너무도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의 추종자들이 모인 교회는 -때로는 세상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역사의 승자인가?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 손희송(의정부교구장) 주교
[가톨릭평화신문 2026-04-14 오후 6:32:24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