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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파우스트」: 욕망의 정화 2026-03-18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어보지 않았어도, 주인공이 악마와 계약을 맺는 장면은 익히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지식과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까지 팔아 버리는 상상력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치명적인 매력을 드러낸다. 그러나 파우스트 유형의 인물은 괴테의 고유한 창작은 아니다. 이미 중세 시대부터 전설 속의 인물 혹은 실존 인물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했다. 전통적으로 파우스트는 결말에서 구원받지 못하지만, 괴테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미국 예수회 어느 관구장 신부가 임기를 마치면서,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는지’ 질문받았다. ‘하고 싶은 사도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예수회원이 제일 힘들었다고 했다. 욕망은 어떤 부정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생물학적, 심리적, 정신적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필수 원동력이기도 하다. 살고자 하는 욕구와 행복하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멈춰버릴 것이다.


파우스트 사건의 시작은 욕망이었다. 인간의 지식으로 채워지지 않는 욕망. 결국 악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신적인 절대적 만족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을 실행한다. 계약에 따르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지상에서 지식, 경험, 쾌락을 파우스트에게 제공하며, 대가로 파우스트는 죽은 뒤 악마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계약에는 매우 중요한 조건이 있다.


파우스트가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있어야 계약이 성립된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절대적 만족을 경험한 순간, 파우스트는 죽어 악마의 소유가 된다. 괴테는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통하여 인간이 현세에서 온전한 만족에 도달할 수 있는지 질문하고 있다.


절대적 만족에 도달하기 위해 악마와 계약맺은 파우스트
자기중심적 욕망 채우려다…주변 사람들 희생시키고 파괴


제1부는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을 다룬다. 악마의 힘으로 20대 청년으로 변신한 주인공은 15세 소녀 그레트헨을 사랑하게 된다. 형이상학적 갈망은 에로틱한 형태로 굴절된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사랑 안에서 유한함을 초월할 수 있는 영원성의 한 단면을 찾으며, 절대적 실재가 형상화될 가능성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비극적 결말을 초래한다. 그레트헨과의 밀회를 위해 그녀의 어머니에게 건넨 과도한 수면제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가 죽고, 동생의 타락에 분노한 오빠는 파우스트와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파우스트의 아이를 임신하였으나, 그에게 버림받은 그녀는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인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녀는 결국 처형당하게 된다.


파우스트의 욕망은 자기중심적이다. 사랑하는 대상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고 희생시킨다. 그의 욕망은 절대적 실재의 숭고함을 향하였지만 자기 자신에 집중되어 있고, 영원성이라는 위대한 비전을 추구하지만, 주변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는 보지 못한다. 1부에서 파우스트의 욕망은 파괴적이고 지극히 자기 소유적이다.


제2부에서 파우스트는 개인의 만족을 위한 욕망에서 벗어나, 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위한 욕망을 보여준다. 1부에서 그는 그레트헨을 중심으로 감각적, 정서적, 지적 차원의 충만함을 추구하였지만, 2부에서는 정치적 혼란을 수습, 지폐 발행, 고전적 아름다움의 회복, 대규모 공학적 토목 사업 등 세계를 다시 새롭게 형성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자신이 기획한 사업들의 결과가 초래한 타인들의 삶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인식하게 된다.


파우스트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노 부부가 소유한 작은 오두막, 경당, 라임 나무들을 자신의 개발 사업에 포함하기 위해, 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동시에 양심의 찔림을 느낀다: “그대들처럼 영리한 이들에게 말하건대, / 내 마음은 찔리고 또 찔려 / 더는 견디기조차 어렵소.” 이주 과정에서 그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그는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폭력적이었구나!”라고 후회한다. 그는 처음으로 진실한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프로젝트로 인한 파괴적 결과에 대한 책임을 깨닫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봉사하는 삶으로 회심했을 때


비로소 완전한 만족감 얻어


마침내 결말에 이르러 늙고 장님이 된 파우스트는 바다로부터 획득한 땅에서 모든 사람이 충만하게 번성할 이상적 미래 공동체를 상상한다: “자유로운 민족이 자유롭게 서 있는 / 자유의 토지.” 그 순간 메피스토펠레스와 맺었던 계약의 치명적 조건인,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라는 최고의 충만함을 표현한다. 진정한 만족 속에서 머물기를 원하는 순간이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던 파우스트는 계약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파우스트가 경험한 이 ‘순간’은 욕망의 절대적 충족이라기보다는, 욕망이 온전히 정화된 순간이다. 주인공은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소유적이고 파괴적인 갈망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인류의 자유와 번영을 건설하기 위한 욕망에 이르렀다.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욕망의 힘은 그대로이지만, 욕망의 대상이 변화되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전쟁에서 다치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회심하였다. 과거엔 귀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면, 이제는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투신하는 것이다. 이냐시오 성인 개인의 고유한 열정과 욕망의 힘은 그대로이지만, 욕망의 목표가 바뀌었다. 회개의 핵심 내용은 방향의 전환이다. 로마 군인들이 행진하며 방향을 바꿀 때, ‘메타노이아’라고 외쳤던 것처럼, 파우스트도 개인의 만족을 위한 욕망에서, 타인에 대한 봉사의 욕망으로 변화되었다.


마지막에 파우스트가 절대적 만족감을 표현하기 때문에 악마와의 계약이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계약을 맺을 때의 절대적 만족과 마지막에 경험한 절대적 만족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계약서에 있는 만족은 개인적 욕구를 채우는 것이지만, 끝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줌으로써 경험되는 만족이었다.


개인의 사적인 욕구를 비우고, 타인의 욕구를 채워줄 때, 역설적으로 인간의 유한함을 초월하는 절대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가장 완전한 사랑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요한 15,13 참조)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파우스트는 자신의 개인적 욕구들을 내려놓고, 타인에 대한 봉사의 삶을 꿈꾼 순간 가장 완전한 만족감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고백과 일맥상통한다.


기존의 파우스트와는 다르게 괴테의 파우스트는 죽는 순간 천사들의 도움으로 구원받는다. 비록 정화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잘못을 하였지만, 끝까지 갈구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18~19세기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정신 안에서 괴테는 유한한 인간이 이성과 감정의 능력으로 무한한 절대적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이상화하였다.


결과보다는 과정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회를 ‘순례자’로 인식한 것처럼, 괴테의 파우스트는 “분투하는 한, 끊임없이 오류에 빠진다.” 18세기 영국의 대표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는 “실수는 인간의 몫이요, 용서는 신의 덕목이다”라고 말한다.



글 _ 김치헌 바오로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영문학부 교수)

[가톨릭신문 2026-03-18 오전 9:12:22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