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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성직 신부 활약 속 대두된 ‘성사 집행 권한’ 논란 | 2026-0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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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직 신부들의 활동과 한글 교회 서적 출판 이승훈에게 사제로 임명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최창현(요한), 홍낙민(루카),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정약전·약용(요한 사도) 형제 등은 자신의 삶 터에서 미사를 주례하고, 세례와 견진·고해 성사를 집전했다. 이들은 중국 비단으로 조선 복식의 제의를 만들어 입었고, 성사 예식을 집전할 때는 관을 썼다. 이존창의 경우 미사 중에 성찬례용 금잔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성체를 축성해 교우들에게 영해 줬다. 고해성사 때는 단 위에 높은 의자를 놓고 앉아 서서 죄를 고하는 신자들의 고백을 들었다. 일반적으로 보속은 ‘희사’, 곧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과 봉사였다. 그리고 중죄를 지은 교우에겐 직접 회초리로 고해자의 종아리를 때렸다. 조선 예법에 따라 여교우들과 한 방에서 마주하며 고해성사를 주는 것을 거부했지만 여교우들이 하도 간절히 청해 할 수 없이 성사를 주어야만 했다. 가성직 신부들은 헌신적으로 자기 직무를 수행했다. 교우들은 열성으로 미사에 참여했고, 온 정성으로 성사를 받으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새 영세자들도 진심으로 하느님 은총을 체험했다. 이러한 성무 속에서도 모든 신부는 허영과 자만에 빠지지 않으려고 서로 격려했다. 회장으로 임명된 최창현(당시 27세)은 한양에 집 한 채를 세내어 전례 공간으로 사용했다. 그는 활동적이고 총명해 가성직 신부들을 맞아들이고 교우들이 성사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등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는 귀찮음과 피곤함도 마다치 않고 밤낮으로 이 직분에 몰두했다. 역관 출신이었던 최창현은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한글로 옮기는 일에 무엇보다 힘을 쏟았다. 덕산 출신 김사집(프란치스코, 당시 42세), 한양에서 약방을 운영하던 정인혁(타대오)도 한글로 된 교회 서적 출판에 앞장섰다. 한문을 모르는 교우들이 늘어나면서 한글 교회 서적이 그만큼 필요했다. 이들은 그 무엇보다 ‘주님의 기도’를 비롯해 성모송 등 주요 기도문을 나눠주고 소리 내 기도하게 했다. 가성직 신부들의 활동으로 1년여 만에 약 1000명에 달하는 조선의 그리스도인이 탄생했다. 이들 가운데 눈여겨볼 두 인물이 있는데 바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와 윤지충(바오로)이다. 1786년 가을, 이승훈으로부터 신부로 임명돼 사제 직무를 수행하던 한 인물이 이듬해 봄 자신들의 성직 신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교회 서적을 읽다가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정해진 교육을 받은 후 성품 성사와 그에 따른 인호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깊은 고민에 빠졌던 것이다. 가성직제도 중단 촉구한 편지 한 통 이승훈에게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승훈에게 쓴 편지 원문은 없고 다만 북경 선교사가 프랑스어로 옮긴 내용만이 교황청 문서고에 보관돼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번역문에는 작성자가 ‘Hiuenchen’(‘이웬쉔’ 또는 ‘현천’)으로 나오는데 이것 또한 한자를 중국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어서 누구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이에 고 최석우 몬시뇰은 교황청 복음화부 고문서고에서 발견한 프랑스어 번역문과 「사학징의」에 실린 ‘유관검 공초’를 대조해 유항검이 제기했다고 주장한다. 또 차기진 박사는 당시 신부로 활동했던 정약전이 그 주인공이라며 근거로 그의 관명이 ‘천전’이라고 제시한다. 또 다른 이들은 권일신, 이가환이 썼다고 한다. 가성직제도에 의문을 제기한 편지 내용은 이렇다. “지난번 모임에서 많은 논의를 거친 끝에 제가 미사와 견진성사를 집전하는 일을 맡아보도록 결정이 났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 명령에 순순히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우리 성교회에 대한 책 여러 권을 아주 집중적으로 찬찬히 읽어 보고 저는 그만 기절초풍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제품을 받으면 인호를 받게 되는데, 바로 이 인호가 없는 사람은 사제의 직무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수행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여러 책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께서는 그라몽 신부님한테서 이런 인호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저희를 사제품에 오르게 할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께서 하셨던 일보다 더 무모한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 따라서 저는 당신과 또 다른 모든 분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 견해에 따르면, 모든 성사 집행을 완전히 중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당에 계신 우리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가 지은 죄들을 모두 그분들께 고백한 다음, 우리 죄에 대한 보속을 청하고,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의문점들을 풀어주시기를 부탁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천주교회사 1」 281~284쪽) 성사 집전 멈추게 한 이승훈 이승훈은 이 편지를 읽고 사안의 중대성을 인지, 자신이 임명한 가성직 신부들에게 즉각 성사 집전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초기 조선 교회 지도자들 곧 가성직단은 북경에 사람을 보내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가장 올바른 답을 구해 오기로 했다. 이렇게 초기 조선 교회 가성직제도는 1786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약 6개월간 운영됐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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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평화신문 2026-03-11 오전 9:12:10 일 발행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