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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오늘을 살아라! 2025-11-19

‘오늘을 살아라!’ 사막 교부들의 이 권고는 ‘오늘을 잡아라’라는 뜻의 라틴어 경구 ‘카르페 디엠(Carpe diem)’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경구는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한 시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여 오늘을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자세’를 강조하는 말이다. 오늘을 살아라 역시 오늘 하루를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다.


하루살이 인생


우리는 자칫 이미 지나간 과거에 저당 잡혀 살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걱정을 가불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가장 확실한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 속에 살게 된다. 사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늘 지금, 이 순간뿐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올지 안 올지 불투명하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일 수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떠서 새날을 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하루를 마치면 다시 죽음으로 들어간다. 어찌 보면 우리 삶은 매일이 부활과 죽음의 연속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삶이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 가사 중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는 구절이 있다. 


딱 적절한 표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확실한 시간은 오늘이기에 그렇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 내일 내가 다시 새 날을 볼 수 있을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하루살이 인생인 셈이다. 물론 이는 부정적 의미가 아닌 긍정적 의미에서다.



현재에 머무는 삶


현재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Nunc et hic)’ 머무는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현재 지금 여기에 머물며 오늘 하루를 살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있다. 이런 모습은 일상에서 흔치 않게 목격된다. 예컨대, 여러 사람과 악수할 때 악수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 다음 악수할 사람을 쳐다보며 악수하는 것이다. 이런 인사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이라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또 공동 기도 중에 마음이나 정신이 현재 낭송하는 시편 구절이 아닌 벌써 다음 구절에 가 있다든지, 기도 후의 일들에 대해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을 마음 없이 건성으로 하는 것이다. 자기가 싫어하거나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생활에서도 이런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이라는 이 귀한 생명의 시간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하든, 그릇을 닦든, 음식을 하든, 그 외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지 거기에 마음과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문을 여닫거나 식탁을 차릴 때도 거기 마음이 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에 머무는 삶이다.
 


매일 새롭게 새 생명 얻으며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삶


현재에 충실히 최선 다하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 살길


현재에 충실한 삶


현재에 머무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에 충실한 자세 곧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 역시 중요하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삶은 곧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기도 하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한다면, 오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매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은 허무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러 해 전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고 자차만 손상되었을 뿐이다. 사고 상황에서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맡겼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멀쩡히 살아 있었다. 이때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리고 평소에 너무 익숙하여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아름답고 새롭게 다가왔다. 또 내게 허락된 이 생명의 시간을 감사하며 귀하게 여기고 기쁘게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일상이 타성에 젖을 때마다 이 죽음의 체험을 떠올리며 다짐을 새롭게 하곤 한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말한다. “오늘을 자기 생애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경건하게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 ‘너의 마지막 때를 기억하라. 그러면 결코 죄를 짓지 않으리라.’(집회 7,36)”(「천국의 사다리」 6,61) 그래서 현재에 충실한 삶은 죽음에 대한 기억과 연결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이유로 고뇌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곤 한다. 적지 않은 경우, 우리 고뇌와 슬픔, 불안과 좌절의 원인은 내 안에 있을 수 있다. 무엇인가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욕망은 우리가 현재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지금 이 순간을 누리며 충실히 살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우리에게 확실히 보장된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이 귀한 생명의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낸다고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고 안타깝지 않을까?


‘인생이 허무하다’란 말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하나는 부정적 측면인데, 곧 허무주의다. 이것은 고질병이다. 여기에 빠지면 기운이 빠지고 삶이 무의미해지고 심지어 생명을 포기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수도 있다. 이와 달리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바탕을 둔 경우다. 이 경우, ‘인생이 허무하다’란 말은 이 세상의 유한성과 우리가 향해야 할 지향점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인생을 더욱 값지게, 감사하게,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살게 해준다. 이는 참된 신앙인이 갖게 되는 태도다. 코헬렛 저자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라고 했을 때도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사실 인생이 짧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냥 무의미하게 보내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 이 세상 여정을 마감할 때까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늘 현재에 깨어 있고 현재를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과거나 미래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막 교부들이 우리에게 “오늘을 살아라!” 하고 권고하는 이유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2025-11-19 오전 9:12:31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