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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성월을 보내며 2025-09-24

온몸을 흰색 가운으로 두르고 머리에는 두건을, 입에는 마스크를 쓴 보건소 근무자가 쉬는 시간도 없이 밀려오는 사람들의 코에 면봉을 넣어 체액을 채취하는 코로나19 신속 항원 검사의 풍경이 벌써 까마득한 옛날의 모습처럼 아른하기만 하다. 매일 텔레비전에 나와 브리핑하던 사람의 검은 머리카락이 이내 흰머리로 바뀌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해안과 남부지방에 산불이 났을 때 그을음으로 가득한 얼굴로 길바닥에 지쳐 쓰러졌던 소방관들과 진화대원들의 모습에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짧은 순간이든 오랜 기간이든 최선을 다한 사람들 덕분에 우리의 안녕과 평화는 유지되고 있다.


우리 교회에도 그렇게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말기 극심했던 신분의 차별을 넘어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 그야말로 창조의 질서 안에서 하느님 보시기 좋은 세상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다. ‘치명!’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분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불렀다. 


당시의 사회는 대역죄인이라는 말로 그 역행을 용납하지 않았다. 투옥과 고문과 사형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반상과 남녀의 구별이 분명한 세상에서 평등을 외쳤던 우리 신앙 선조들이 온 마음과 몸으로 받아 안은 고난이었다. 더구나 멀고 먼 타국에서 진리를 전하고자 고향을 떠나왔던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사서 고생’이 아닐 수 없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이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가진 꿈을 실현하고자 폭력을 사용하거나 세를 모아 대항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진리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1886년 조불 조약 체결 이후라면 가능했을 일을 뭐가 그리 급하다고 백 년을 앞서 살았는지 실로 동시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각 분야에서 불가능하다는 일을 하는 사람들, 대세를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다 지어진 군사기지 옆에서 평화는 무력으로 이룰 수 없다며 전쟁기지 폐쇄를 외치는 사람들, 이미 완공된 4대강 16개의 보를 해체하라는 환경운동가들, ‘아직도 그 타령’이냐는 소리를 들으며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들,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가 당연한 세상에서 해고 철회를 외치며 농성하는 사람들…. 


조금 더 세상이 좋아지면 가능할 일을 하필 그때, 그 암울하고 힘든 시기에도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조금씩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일상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사람들! 그나마 그 하루가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하루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사람들, 매달 갚아야 할 빚으로 메꾸고 또 메꾸는 인생을 꾸려가는 사람들,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 치매 어른을 모시며 긴장과 불안을 살아가는 사람들, 알코올이나 도박과 게임 중독으로 폐인이 된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 


그래도 그 하루를 버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것 던져버리고 훌훌 떠나고 싶은 유혹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찾아올 텐데, 끝내 그 손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역시 오늘날의 순교가 아닐 수 없다.


그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그 최선이 덧없고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고 응원하고 지지하는 공동체였으면 좋겠다. 늘 이야기하고 꿈꾸는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살해되며 도살된 양처럼 여겨지지만,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는 세상을 확신하며”(로마 8, 36-38 참조) 살아가는 최선이기를, 다른 이를 짓밟고 이겨내는 최선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순교자 성월을 보낸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가톨릭신문 2025-09-24 오전 8:32:33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