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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위기 속 전구자 통고의 성모 성지 독일 ‘텔크테’ 2025-09-17
텔크테 본당 성 클레멘스 성당과 은총 소성당. 텔크테에는 800년 무렵 이미 가톨릭 공동체가 있었다. 성 클레멘스 성당은 1500년 무렵 마을의 대화재로 기존 성당이 전소된 뒤 1522~1557년 지금의 엠스강가 자리에 새로 건립됐다. 현재 순례 성당 역할을 겸하고 있다.

1648년 유럽은 피로 짙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이어진 신·구교 전쟁은 유럽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신앙을 의심했고, 공동체는 무너졌습니다. 그 긴 어둠의 끝자락에서 평화를 위한 협상 무대가 독일 뮌스터에서 마련됩니다. 그 유명한 베스트팔렌 조약이 여기서 체결되는데요. 종교개혁 이후 처음으로 가톨릭과 신교의 공존을 법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은 깊었습니다. 삶은 여전히 불안했고, 더구나 영주의 종교에 따라 그 지역 종교가 정해지면서 북서 독일은 대부분 신교 지역이 됩니다. 뮌스터 지역은 강력한 제후주교가 다스리고 있었기에 가톨릭 지역으로 남을 수 있었죠. 하지만 신앙 공동체는 ‘어떻게 다시 신앙을 지켜낼 것인가’라는 근본적 문제에 직면합니다. 그때 뮌스터 인근의 작은 마을 텔크테(Telgte)에서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타오릅니다. 위로를 찾던 신자들은 텔크테 성모자상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아들을 무릎에 안고 있는 성모님, 주검을 감싸안은 어머니에게서 다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봅니다.
텔크테 통고의 성모자상. 성모상 몸체에 예수님의 채찍 조각과 순교자 아폴로니아의 치아·성 파코미우스의 뼈 등 여러 성유물이 봉안돼 있으며, 그중 나치 정권에 용감히 맞서서 ‘사자 주교’로 불렸던 복자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폰 갈렌(1878~1946) 추기경의 성유물도 포함돼 있다.

텔크테 신자들의 보호자이자 전구자 ‘통고의 성모’

텔크테는 뮌스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구 2만 명이 사는 작은 도시입니다. 뮌스터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면 바로 다음 역이 텔크테역입니다. 역에서 나와 도심으로 10여 분 걸으면 팔각형의 은총 소성당과 엠스강가에 첨탑이 우뚝 솟은 텔크테 본당의 성 클레멘스 성당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은총 소성당에 가까이 다가가면 팔각형 중앙집중식 입체 구조로 건물을 덮고 있는 돔이 장엄한 분위기를 줍니다. 소성당 내부는 부드러운 곡선과 장식이 어우러져 은총의 장소임을 드러냅니다. 소성당 중앙에 바로 그 피에타상, 즉 통고의 성모(Mater dolorosa)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1m 높이의 목조상으로 순례자들의 눈물과 희망을 받아왔지요. 성모님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절망에 무너지지 않고 자애로움과 위엄을 보여줍니다. 전쟁과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성모자상은 소성당을 짓기 전에는 성 클레멘스 성당 밖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성모자상은 1390년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인 텔크테의 보리수로 제작했다고 합니다만, 정확하게 하나의 나무로 만든 것이 아니라 여러 나무 블록이 사용되었습니다. 아마도 텔크테의 한 부유한 상인이 부모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이 피에타상을 봉헌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미 1466년에 피에타상의 처마를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일찍부터 텔크테 신자들은 일상에서 성당 앞에 모신 통고의 성모님을 보호자·전구자로 크게 의지하며 공경했던 것 같습니다.
 
텔크테 은총 소성당. 통고의 성모자상을 모시기 위해 세운 소성당으로 프란치스코회 요도쿠스 뤼케 신부가 건축을 맡았다. 팔각형의 바로크 양식의 대칭미가 잘 드러난 성당으로, 각 모서리에 코린트식 기둥이 2단으로 된 높은 기단 위에 놓여 있어 이 건물의 성스러운 성격을 한층 강조한다. 종탑은 1763년 제의실과 함께 추가로 건축된 것이다.
 
오스나브뤼크교구의 텔크테 순례(2023). 매년 1만 명 가까운 이가 참여하는, 독일어권에서 가장 큰 도보 순례 중 하나로 1852년부터 뮌스터교구의 이웃인 오스나브뤼크교구가 조직적으로 시작한 도보 순례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후 두 번째 주말에 오스나브뤼크와 그 주변 지역 사람들은 오스나브뤼크에서 출발해 꼬박 하루를 걸어 텔크테 통고의 성모님을 찾아가 순례한다.

17세기부터 이어져 온 텔크테 순례

종교개혁의 격랑 속에서도 텔크테의 성모 신심은 끊기지 않았습니다. 참혹한 30년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욱 간절하게 성모님의 위로를 청했지요. 가톨릭 쇄신에 나선 교회는 이런 자발적 성모 신심으로 교구민을 하나로 묶으려 했습니다. 당시 뮌스터교구장 크리스토프 베른하르트 폰 갈렌 제후주교(재위 1650~1678)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쇄신 정신에 따라 수도회를 후원하고 성모 신심 행렬과 순례를 조직적으로 장려하며 가톨릭 정체성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1651년 주교는 뮌스터와 바렌도르프 본당들에 ‘텔크테 순례’를 지시합니다. 1654년에 텔그테를 뮌스터교구의 주요 순례지로 지정하며, 성 클레멘스 본당 옆에 성모님을 모실 새로운 은총 소성당의 초석을 놓습니다. 1657년 은총 소성당이 완공된 후 텔크테 성모 순례는 교구 전체의 대표적인 은총 행사로 자리 잡지요.

당시 뮌스터에서 텔그테까지 순례길이 현재 51번 연방도로를 따라 조성되었는데, 성모 마리아의 삶의 장면을 양면에 새긴 5개의 순례비를 세웠습니다. 뮌스터 쪽에는 성모님의 슬픔이, 텔크테 쪽에는 성모님의 기쁨이 묘사되어 있어서 신자들이 텔크테로 향할 때와 성모님을 뵙고 돌아갈 때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느끼도록 했지요. 이런 노력 덕분에 신교가 우세한 북서독일 속에서도 뮌스터는 가톨릭 섬으로 굳건히 남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텔크테 순례비. 1658~1663년 당시 뮌스터 예수회 대학의 요한 블랑켄포르트 학장 신부는 성모 마리아의 삶에서 슬펐던 장면과 기뻤던 장면 총 10개 장면을 추려서 뮌스터에서 텔크테로 가는 길가 5곳에 순례비를 세웠다.

텔크테 순례는 뮌스터교구민의 신심에서 출발했지만, 19세기 오스나브뤼크교구민이 참여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오스나브뤼크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가톨릭과 루터교가 공존한 도시로 주교직을 가톨릭 주교와 신교 영주가 교대로 맡은 특이한 곳이었습니다. 가톨릭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흔들릴 때마다 신자들은 텔크테를 신앙의 안식처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1802년 오스나브뤼크교구가 최종적으로 가톨릭으로 남게 되면서 1852년 교구 차원에서 오스나브뤼크-텔크테 도보 순례를 조직적으로 시작합니다. 현재까지 매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 후 두 번째 주말 자정 미사를 시작으로 1만 명에 가까운 순례자들이 오스나브뤼크에서 출발해 텔크테까지 도보 순례합니다. 이 순례는 속죄의 성격을 띱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회개와 속죄를 강조하는 종교적 의미가 강하지요. 이 때문에 참가자들은 공동의 기도와 고난을 나누는 순례 공동체로서 함께 걷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는 「텔크테에서의 만남」(1979)에서 30년 전쟁의 상흔을 입은 작은 도시 텔크테를 무대로 독일 문인들이 미래를 모색하는 가상의 만남을 그려냈습니다. 그에게 텔크테는 전후 독일 문학 재건을 은유하는 무대였던 거지요. 하지만 현실의 텔크테는 통고의 성모님 품 안에서 눈물을 봉헌하며 다시 일어선 신앙 공동체의 현장이었습니다. 믿음을 은총으로 응답한 곳에서 문학도 희망을 말하려 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순례 팁>

※ 뮌스터 중앙역에서 텔크테역까지 기차(RB67)로 13분, 버스(R11) 36분 소요. 도보로는 12㎞ 거리다. 텔크테에 순례자를 위한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 은총 소성당 및 성 크리스토프 성당 미사 : 주일과 대축일(본당) 8:00·10:00(순례 미사)·11:30·18:30, 평일(은총 소성당) 9:00·19:00(화)

※ 유럽의 다른 순례지에 관한 알찬 정보는 「독일 간 김에 순례– 뮌헨과 남부 독일」(분도출판사 2025)


 
[가톨릭평화신문 2025-09-17 오전 10:12:35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