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툿찡 수녀회 100년, 교육과 자선으로 한국에 뿌리내리다 2025-09-17
<사진 1> ‘베네딕도회 성 데레사의 집과 첫 한국 파견 수녀들’, 1925년 11월 원산수녀원,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1925년 11월 21일 수녀 4명 원산에 첫발

수도생활과 선교 활동은 이질적인 삶 같지만,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다. 수도원에서의 기도와 관상 생활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복음 선포’였다. 가르멜의 수도자 리지외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선교의 수호성인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수도생활과 선교는 가톨릭교회 수도회의 모태인 성 베네딕도회의 전통이기도 하다. 성 베네딕도회는 유럽 곳곳에 수도원을 짓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마을을 조성해 신앙 공동체를 꾸리고 이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했다. 그들은 이민족을 환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존중했다. 이 친교의 삶은 수도원 안에 정주하며 최우선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사랑 안에서 모든 것에 열려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의 실천이었다.

성 베네딕도회 선교 수도원인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전통 베네딕도회의 정신으로 한국에 진출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이어 한국에 두 번째로 진출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는 오는 11월 21일이면 100주년을 맞는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는 덕원수도원장이며 원산대목구장인 하느님의 종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의 초청으로 한국에 진출했다. 분원장 마틸다 히르쉬(Mathilde hirsch) 수녀와 크리소스토마 슈미트(Chrysostoma Schmidt)·다니엘라 키르히비클러(Daniela Kirchbichler)·헤르메티스 그로흐(Hermetis Groh) 수녀가 3개월의 항해 끝에 1925년 11월 21일 원산에 도착했다.<사진 1>

용감한 네 명의 수녀는 원산에 도착하자마자 공소와 외교인 마을을 방문해 한국인들과 친교를 쌓으려 노력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는 환영받았지만 외교인들에게는 욕을 먹고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한국인들을 찾아 나섰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와 공부하는 어린이들’, 1925~1944년,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원산에 6년제 해성학교 세워 여학생 교육

“여자들은 우리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한 집에서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우리를 맞이하러 뛰어나왔다. 그들은 ‘찬미 예수’라고 인사하면서 우리를 작은 성당으로 안내했다. (?) 남자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다 함께 바닥에 깔아 놓은 멍석 위에 앉았다. 우리가 왔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져 남자들과 아이들, 아기를 들쳐 업은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오는 사람마다 자신의 세례명을 밝히며 몸을 깊이 숙여 인사했다. 원산 같은 도시에서는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 완고한 외교인 마을 두 곳도 방문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이후 수년에 이르도록 수녀들 말을 귀 기울이기는커녕 그녀들을 적대시하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분도통사」 394~395쪽)

네 수녀는 공소 방문과 외교인 선교뿐 아니라 원래 온 목적대로 해성여자중학교에서 여학생을 도맡아 교육했다. 슈미트 수녀는 교장으로, 키르히비클러 수녀는 수예 교사로, 그로흐 수녀는 간호사 겸 요리사로 활동했다.

당시 원산에는 3만 명이 거주했다. 그중 1만 명이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남자 중학교와 여자 중학교가 있었는데 한국인 여학생 수는 1~2%에 불과했다. 한국인 여학생은 원산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사진 3> ‘착복식을 마치고 사우어 아빠스와 함께’, 원산수녀원, 랜턴 슬라이드,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는 장기적인 선교 프로그램으로 학교 교육을 시행했다. 넓은 바다에서 환히 비추어주는 샛별처럼 한국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지혜를 비추어줌으로써 장차 이 나라의 큰 별이 되라는 소망을 담아 ‘바다의 별’ 곧 ‘해성(海星)’이라 지었다. 이는 바다의 별로서 바른 인생길의 길잡이가 되어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호칭이기도 하다.

해성학교는 6년제로 운영됐다. 수녀들이 진출한 지 불과 3년 만인 1928년에 15학급, 학생 689명, 교사 17명으로 성장했다. 1944년 해성학교 총 학생 수는 약 1000명에 달했다. 수녀들은 우수한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수녀원에 입회한 한국인 지원자들을 사범학교에 진학시켰다.

원산대목구에서 베네딕도회 남녀 수도자들의 활동으로 인한 교육사업이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다. 1940년 원산대목구 통계에 따르면 인가받은 가톨릭 학교가 12개교, 남녀 학생 수 5159명, 미인가 학교 15개교 학생 수 1425명으로 당시에는 “성당이 있는 곳에 학교가 있고, 학교가 있는 곳에 성당이 있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사진 2>

“한국 여자는 가진 것이 없다. 가난한 탓에 그들은 일본인들의 하인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아침 6시부터 늦은 밤까지 죽도록 일하고 6엔, 많으면 8엔을 월급으로 받는다. 이 정도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쉬는 날도 없다. 그들은 핑계를 대고 가끔 주일에 주인집을 빠져나와 미사를 드리러 온다. (?) 우리 해성학교는 시 당국과 주민들 사이에서 가장 훌륭한 사립학교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월사금을 마련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 학교뿐 아니라 한국 전체의 실상이다. 차이가 있다면 공립학교는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학생들을 퇴학시키는데 우리는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학생들을 퇴학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분도통사」 550~552쪽)
<사진 4>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 첫 한국인 지원자들’, 유리건판,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학교 교육뿐 아니라 자선사업에도 헌신적

놀라운 일은 베네딕도회 수녀들이 진출한 지 한 달만인 1925년 12월 말 한국인 지원자 2명이 입회했다는 것이다. 1927년 6월 6일 지하 1층 지상 3층 적벽돌 건물로 원산 수녀원이 지어져 축성됐다. 이에 원산 수녀원은 분원에서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됐고 초대 수녀원장으로 히르쉬 수녀가 임명됐다. 또 수련원이 승인돼 16명의 한국인 지원자가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이들 중 6명의 수련자가 1931년 5월 25일 사우어 주교아빠스 주례로 첫서원을 했고, 1934년 5월 26일 한국인 5명을 포함해 7명의 수녀가 첫 종신서원을 했다.<사진 3>

“한국 선교의 미래는 우리 한국인 수녀들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수녀원 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국인 수녀들이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없다. 주방과 정원, 세탁실과 학교 등 어디서나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제의를 수놓는 그들의 손재주는 너무나 훌륭하다. 음악 재능도 뛰어나다. 수녀원 안에서는 피아노·풍금·바이올린 소리가 하루 종일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작은 새들처럼 노래도 참 잘한다. 한국어로 된 ‘예수성심도문’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 나는 그녀들의 순수하고 맑은 노랫소리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성가에 대한 섬세한 이해력을 지니고 있다.”(「툿찡 수녀원 연대기」 1929, 213)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은 학교 교육뿐 아니라 자선사업에도 헌신적이었다.(본보 1825호 2025년 9월 7일 자 참조) 이들의 자기 희생적 삶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는 “어떤 일이 있어도 수녀들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사진 4>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25-09-17 오전 9:52:23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