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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2025-09-17

로마 베네치아 광장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과 마주 보는 한 건물의 외벽에는 다음과 같은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이곳에 신성 미켈란젤로(divino Michelangelo)가 살다가 숨을 거둔 집이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30년 동안 살다가 89세가 되던 156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그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 사람들이 몰래 미켈란젤로의 시신을 피렌체로 옮겨 산타 크로체 성당에 모시고 그 어떤 군주보다도 장엄하게 장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14세 때 미켈란젤로를 찾아와 제자가 된 조르조 바사리는 스승의 무덤을 설계하면서 회화, 조각, 건축을 상징하는 세 개의 조각상을 전면에 두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예술의 세 분야에서 모두 최고였음을, 굳이 역사에 맡기지 않고도 그 시대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1475년 아레초의 카프레세에서 포데스타(치안행정관)로 재직 중인 루도비코 부오나로티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피렌체의 귀족이었던 부오나로티 가문은 생계유지를 위해 그곳에 갔고, 머지않아 피렌체의 세티냐노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은 피에트라 세레나라는 석재가 나는 고장으로 주민 대부분이 석공이었고, 그를 키워준 유모의 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소년 미켈란젤로는 어려서부터 돌을 다루는 법을 배웠고 훌륭한 예술적 기질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예술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기울은 가문이 사회적으로 아예 강등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미켈란젤로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12살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들어가서, 당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프레스코화 작업을 하는 스승으로부터 고도의 회화 기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라는 화실에서 조토와 마사초 등의 작품을 접하며 실력을 다졌습니다.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가 후원하는 예술 아카데미아가 있는 산 마르코 수도원의 정원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로렌초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양자로 받아들였습니다. 15살의 미켈란젤로는 그곳에서 당대의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신플라톤주의를 배웠고, 메디치가의 후손으로 훗날 교황이 된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를 만나 우정을 쌓았습니다.



이후 로렌초의 사망과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 그리고 사보나롤라의 등장으로 피렌체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미켈란젤로는 베네치아와 볼로냐 등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작품들을 접하였습니다. 그리고 21살에 로마에 도착하여 첫 번째 로마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이내 술에 취한 청년의 <바쿠스상>(바르젤로 미술관)을 선보였고, 다음 해에는 <피에타상>(성 베드로 대성당)을 조각하면서, 자신이 예술적 성숙기에 도달했음을 입증했습니다. 그는 이냐시오 성인과 가깝게 지낼 정도로 신심이 두터웠고, 그것을 표현한 그의 첫 번째 카라라 대리석 작품인 <피에타상>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5년간의 로마 생활을 마친 미켈란젤로는 1501년 다시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로마에서 얻은 명성으로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상 의뢰가 넘쳐났는데, 그중에서 피렌체 대성당의 ‘오페라 델 두오모’가 주문한 <다윗상>(아카데미아 미술관)이 유명합니다. 다윗상은 원래 대성당의 지붕에 올려질 계획이었기 때문에 올려다보기에 적합한 비율로 조각상이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시뇨리아는 이를 도시의 상징으로 삼고자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하였습니다. <다윗상> 작업을 마친 그는 원형 목판에 유성 템페라로 <성가정화>(우피치 미술관)를 남겼습니다. 


또한 팔라초 베키오의 대회의실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앙기아리 전투>와 함께 <카시나 전투>의 프레스코화를 의뢰받았는데, 밑그림만 완성했고 지금은 그 사본만 남아 있습니다.


1505년 그는 다시 로마 생활을 하게 됩니다. 피렌체 출신의 줄리오 다 상갈로는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에서 이룬 업적들을 새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자랑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브라만테와 라파엘로 등의 예술가를 통해서 로마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교황에게 미켈란젤로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황은 먼저 자신의 무덤에 놓일 기념비 제작을 부탁했는데, 그로 인해 미켈란젤로는 온갖 시기와 모략 속에 교황과 관계가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508년 그는 교황으로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 제작을 의뢰받았습니다. 그동안 조각에 전념한 탓에 회화가 낯설었고 브라만테도 그것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는 5년 동안의 고된 작업 끝에 1512년 말 천장화를 완성하였습니다. 몇 달 후 율리오 2세 교황은 사망하고,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새 교황을 위해 산탄젤로성의 교황 경당을 작업했고, 1515년 부오나로티 가문은 팔라티노 백작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1516년 피렌체를 방문한 레오 10세 교황은 미완으로 남은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를 설계 공모하였는데, 미켈란젤로의 목조 모형이 채택되었고 이로써 그의 피렌체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파사드 공사는 예산 등의 이유로 무산되었지만, 교황은 산 로렌초 성당에 메디치 경당(신 성구실) 설계를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였고, 그는 브루넬레스키의 옛 성구실을 참고하여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1523년 다시 메디치가의 클레멘스 7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산 로렌초 성당 영내의 도서관 공사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1534년 교황이 시스티나 경당 제단에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화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기면서 30년간의 세 번째 로마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바오로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미켈란젤로는 교황청 소속 예술가로 임명되었고, 그의 프레스코화는 1536년부터 7년간 작업 끝에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미켈란젤로는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였으며, 율리오 2세의 무덤을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incoli)에 안치하고 <모세상>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71세의 미켈란젤로는 훗날 그의 첫 작품인 <피에타상>이 놓일 곳이며,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 하느님에게서 받은 열정의 마지막 것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신문 2025-09-17 오전 9:32:34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