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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단상] 피에타 앞에 머무르다 2025-08-19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은 저희 어머니의 영명 축일이기도 합니다. 다가올 그날을 준비하며,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고자 수원교구 안성성당에서 순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지 순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하느님 현존과 은총을 체험하는 은혜의 길입니다. 성지는 우리가 계획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르셔야 비로소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마음속에 지키기 위해 틈만 나면 성지를 찾습니다. 그 길에서 저는 늘 주님의 숨결과 어머니의 손길을 느낍니다. 안성성당 성역 안에는 작지만 깊은 울림의 피에타상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 서니,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성심과 순결하고도 찢긴 마음이 제 안에 깊이 스며드는 듯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세상의 죄를 끌어안는 어머니의 모습, 슬픔에 젖은 얼굴, 축 늘어진 예수님의 주검은 복음서를 수없이 읽은 이에게도 새로운 충격과 묵상을 안겨줍니다. 모자가 함께 감내하신 고통과 순종의 무게를 다시금 마음에 새깁니다.

저는 이전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고통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라고 썼다가, “신앙이 고통인가?”라는 댓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글 전체의 뜻을 무시한 미성숙한 반응이었기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런 취지로 쓴 게 아닙니다. 고통을 피하거나 냉담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통해 완성되는 신앙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고통은 악입니까? 고통은 영적인 보탬이 되는 겁니다.”

사실 회개와 극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빼 달라는 현세적인 기도로만 하느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희생이 아닌 저주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고통을 통과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순종의 삶을 하찮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심판이 아니라 자비로, 성령을 통하여 마리아를 택하시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셨고, 숨을 거두기 전 십자가 위에서 마리아를 ‘여인이시여’라 부르신 뒤 ‘어머니’라 하셨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의 방문 때 “예,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응답하신 그 순종은 외아들의 참혹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끝내 “아멘”이라 말하게 했습니다.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하던 날의 환희는 십자가 아래 어머니의 고통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마지막은 모두 성모님의 품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는 모든 천사와 성인의 전구를 넘어서는, 가장 깊고도 효과적인 사랑의 길입니다. 고통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고통을 통해 완성되는 사랑과 희생의 길입니다. 십자고상을 볼 때 “불쌍하다”가 아니라 “아, 이 고통 덕분에 내가 사람 구실 좀 하게 되었구나” 감탄하며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멀게 느껴질 때, 묵주를 들고 성모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저희를 아버지께 간구하시는 예수님, 제 믿음을 보시지 마시고 성모님의 성심을 보시어 저희 기도를 들어주소서.” 그러면 놀랍게도 그 순간부터 주님의 은총이 당신의 가슴을 어루만질 것입니다.

이번 순례의 모든 걸음은 어머니의 영명 축일과 저의 연재를 온전히 봉헌하기 위한 기도의 길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 글과 제 마음을 이끌어,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독자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아멘.


신선비(미카엘) 

 
[가톨릭평화신문 2025-08-19 오후 5:52:15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