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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순교성지, ‘달빛순례’로 순례객 맞아…“신앙 깊이 더하는 시간” 2025-07-0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水原華城) 방화수류정 아래에는 아름다운 연못 용연(龍淵)이 있다. 여름이 시작되는 7월, 버드나무와 연꽃잎의 푸른빛은 용연을 찾는 방문객에게 자연 속 휴식을 선물한다. 해가 지면 용연의 풍경에는 운치가 더해진다. 연못에 비친 달이 떠오르는 ‘용지대월(龍池待月)’은 화성의 절경으로 꼽힌다. 어둠이 깊기에 달빛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기우제를 지냈던 용연에서 박해시기 신자들은 달을 보며 신앙의 자유를 간절히 빌었다. 어둠에 가려진 신앙이 달빛에 비쳐 세상 밖으로 나오길 바랐던 기도는 2025년에 와 닿았다. 수원화성순교성지(전담 김승호 요셉 신부)의 ‘달빛순례’를 통해 연결된 과거와 현재의 기도는 신앙에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순교자와 함께 걷다


“내가 평소에는 진실되게 천주를 공경하지 못했는데, 오늘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니, 이번에 끌려가 죽게 된다면 우리 주님과 성모님께로 가서 살겠소.”


6월 27일 오후 7시30분. 달빛순례는 수원 관아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박원서 마르코의 신앙 고백을 들으며 시작됐다. 적색·백색·녹색순교를 상징하는 붉은색, 하얀색, 녹색 초를 봉헌한 22명의 순례객은 이날의 여정이 단지 순교자의 신앙을 기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임을 마음에 새겼다.


성지를 출발해 300여m 걸어 도착한 곳은 행궁동 마을정원. 정원은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주민들이 직접 디자인해 조성했다. 순교자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도착한 이곳에서 순례객들은 녹색순교의 의미를 생각하며 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우며 순례를 이어갔다. 


장안문 순교터를 지나 화홍문, 용연, 방화수류정, 형옥터, 팔달문 순교터에 이르기까지 4km가량을 걸으며 순례객들은 곳곳에서 순교자들의 신앙과 마주했다. 장안문과 팔달문 순교터는 각각 하느님의 종 지 타대오, 심원경 스테파노가 순교한 장소다. 순례객들은 수원화성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이곳이 왜 순교터가 됐는지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당시 모습을 회상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오가는 장안문과 팔달문에서는 수많은 신자가 공개 처형되어 순교했다. 천주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를 세상에 알리는 장소로 활용된 것이다.



달빛 머금은 용연에서 봉헌하는 ‘무명 순교자’ 위한 기도


오후 9시, 짙은 어둠 속에서 달빛이 드리운 용연은 그 아름다움만큼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복을 빌었던 이곳에서 신앙 선조들은 신앙의 자유를 빌었다. 지금처럼 밝은 조명이 없었던 당시에는 어렴풋한 달빛에 의지해 몰래 손을 모으고 한 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했을 신앙 선조들. 신앙을 지키기 위한 안타까운 노력을 기억하며 순례객들은 무명 순교자를 위한 기도와 사향가를 부르며 가장 오래 이곳에 머물렀다.

9시30분을 넘은 시간, 낮에는 사람들로 붐볐던 팔달문 시장은 적막하기만 하다. 시장 골목 끝에 모인 순례객들은 팔달문 밖 장터에서 모진 매질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심원경 스테파노·심봉학 부자를 기억하며 기도했다.

달빛에 의지해 화성의 성곽길을 오르고 개천을 건너는 여정은 녹록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곳곳에서 봉사자들이 길을 밝혀준 덕분에, 순례객들은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놓치지 않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었다. 밤 9시가 넘은 시간에 수원화성의 성곽길을 걷는 순례객들이 신기한지 지나가는 사람들은 말을 걸거나 함께 해설에 귀 기울이기도 했다.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라 순례 중이에요”라는 말은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순교자’라는 단어를 각인시켰다. 

이날 순례에 참여한 이수정(사비나·제1대리구 고색동본당) 씨는 “순교자들이 지나셨던 길을 함께 걸으면서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사형장으로 가셨을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며 “밤에 하는 순례라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감성적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어서 더 뜻깊었다”고 말했다.





■ 수원화성순교성지 ‘달빛순례’는 수원화성순교성지는 수원화성의 중심에 자리한 순교성지다. 이곳은 조선 후기, 수원 유수부의 토포청이 있었던 군사적 요충지로 병인박해(1866~1873) 당시 순교기록에 남겨진 80여 명 외에도 무명의 많은 순교자가 토포청, 옥터, 성문 밖 장터 등에서 참수, 교수, 장살, 백지사, 옥사 등으로 순교했다. 2009년 9월 20일 순교성지로 공식 선포된 성지에는 조선 후기 순교자 17위와 근현대 순교자 3위 등 하느님의 종 20위의 시복시성과 무명 순교자를 위한 현양미사가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 봉헌되고 있다. 전국적인 박해가 시작되며 수원 유수부 관할 지역에서 붙잡힌 신자들은 수원화성에서 처형됐다. 순교자의 가족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이 되면 용연을 찾아와, 숨죽인 기도 속에 순교자를 기억하고 신앙을 기렸다. 이러한 역사를 기리기 위해 성지에서는 2008년부터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7시 30분, 달빛 아래 신앙의 자유를 위해 기도했던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달빛순례를 이어오고 있다. 순례에 동행한 김승호 신부는 “2주 전 부임한 후 처음으로 달빛순례에 참여했는데, 순교가 단 한 순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해설사님의 말씀이 깊이 남았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봉헌하며 스스로를 포기하는 삶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순교로 이어졌듯이, 우리 역시 일상에서 순교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며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오늘날의 순교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가톨릭신문 2025-07-01 오후 5:52:14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