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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로 유실되기 전 단아하고 아름다운 ‘화성의 무지개’ | 2025-0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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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스가 수채화로 그린 화성 ‘화홍문’ 촬영 수원 화성은 아름다운 성이다. 지금도 많은 이가 찾아와 그 아름다움에 매료돼 사진을 남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조차 화성의 풍경을 촬영해 조선 풍속 사진첩을 출간·판매했다. 또 영국인 엘리자베스 키스는 화성 화홍문을 수채화로 그렸다. 그녀는 한국을 그린 수채화 작품 38점을 엮어 「Old Korea: The Land of Morning Calm」을 출간했다. 이는 세계에 조선을, 우리나라를 알린 최초의 서양화로 평가받는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키스가 수채화로 그린 ‘화홍문(華虹門)’을 촬영했다.<사진 1> 화성에는 남북으로 수원천 물길이 통과하는 2개의 수문이 있다. 이 중 북쪽 성벽에 설치한 북수문이 ‘화홍문’이다. 무지개처럼 생긴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다. 이 무지개 모양의 일곱 홍예 때문에 수문 이름이 화홍(華虹) 곧 ‘화성의 무지개’로 불렸다. 수원천 강물이 화홍문 홍예로 힘차게 흘러 내려와 방화수류정으로 장쾌하게 떨어지며 물보라를 일으키는 게 장관이어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며 수원 삼경으로 꼽았다. 그래서 화홍문은 군사시설이지만 평소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베버 총아빠스가 촬영한 화홍문은 정말 귀한 사진이다. 이 화홍문이 10년 뒤인 1922년 홍수로 유실됐기 때문이다. 1932년 복원된 새 화홍문을 엘리자베스 키스가 수채화로 그렸다. 베버의 사진 속 화홍문은 단아하고 아름답다. 화홍문은 성벽과 망루·성문과 연결돼있고, 왼편 너른 공터 뒤로 민가가 자리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화홍문을 다녀갔는지 편편하게 다져진 오솔길이 꽤 넓다.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이곳에 왔을 때가 1911년 3월 말이어서인지 물이 말라 화홍관창을 사진에 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 ![]() 7개의 석조아치로 만들어진 ‘요정의 사원’ 베버 총아빠스는 화홍문을 ‘요정의 사원’이라 표현했다. “이제 냇가로 내려가야 한다. 시냇물 위쪽의 ‘요정의 사원’도 성벽 일부다. 냇물이 그 아래를 통해 성내로 흘러든다. 물이 얕아서 적들이 마른 발로 내를 건너 성안으로 밀고 들지 못하도록, 성벽 밖에 내를 막아 큰 못을 만들었다. 성벽과 안쪽으로 다리 하나를 지탱하는 일곱 개의 아치 밑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와, 모랫바닥으로 빠르게 떨어진다. 백성들이 조국의 아름다움에 주목할 수 있도록, 당국은 그림처럼 가지 휘늘어진 소나무 몇 그루로 이 수려한 풍경을 완성시킨 후 일 원짜리 지폐에 담았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21~222쪽) 베버 총아빠스는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을 한 프레임에 담아 촬영한 것 외에 별도로 ‘화서문’만을 촬영했다.<사진 2> 조선 시대 성문의 형태를 자세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성문은 매우 용의주도하게 지어졌다. 반원형으로 돌출된 옹성은 적의 파상 공세를 막는 방파제 구실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장에 내다 팔 물품을 싣고 성내로 들어가는 우마차 행렬만 옹성 주위를 휘돌고 있을 따름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20쪽) 베버 총아빠스는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西將臺)’에 올랐다. 장대는 군사 지휘소를 말한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2층 목조 건물이다. 아래층은 3칸 구조로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했다. 위층은 1칸 구조로 감시 초소 역할을 했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여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융릉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정조 임금은 1795년 윤2월 12일 현륭원을 참배한 후 서장대에 올라 군사 훈련을 직접 지휘했다. 그리고 현판에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글과 시문을 썼다. 베버 총아빠스는 서장대를 수채화와 함께 사진에 담았다.<사진 3> “서편 언덕을 올라 짙푸른 솔밭 아래 숨은 작은 산에 이르렀다. 성긴 숲 가운데서 성벽이 끊겼다. 성벽 끝에 돌출된 망루 아래로 깊은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꼭대기 지붕은 세찬 풍우를 견디며 그 힘을 과시했다. 도시에서 제일 높은 그곳이 비상시 수비대장의 지휘소였다. 여기서 그는 성 안팎과 발치의 행궁을 감시하고 경비했다. 들판 저 멀리에서 접근하는 적의 동태도 관측되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22쪽) ![]() 혜경궁 홍씨 회갑연 열면서 신풍루로 개칭 베버 총아빠스는 화성을 빠져나오면서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에 들렀다.<사진 4> 창건 당시 ‘진남루(鎭南樓)’라 이름 지었으나 1795년 정조 임금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신풍루라 했다. 베버 총아빠스는 신풍루를 빠져나오면서 허물어진 화성을 통해 빛바랜 조선의 영화를 안타까워했다. 또 성문 턱까지 일반인이 상주하는 것을 보고 숨통이 옥죄이고 있는 지금의 한국인들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서서히 녹슬어 가는 옛 무기고의 일부처럼 행궁이 있었다. 수원 화성을 지은 임금은 시내에서 몇 시간 거리의 교외에 있는 한국 남부의 유일한 숲에 자신이 영면할 곳을 정했다. 그는 가끔 수원 행궁을 찾았다. 지금은 외국인들이 드나든다. 행궁 앞 지사 관저에는 벌써 일본인들이 상주하고 있다. 단아한 후원은 황폐해졌다. 작은 정원을 몇 개 더 지나 행궁 앞에 섰다. 아랫것들의 궁색한 처소 뒤로 물러난 궁은 몹시 검소했다. 남은 시설물이라고는 석조 기단 양 가의 철제 수조 둘뿐이다. 고작 반 입방미터 남짓의 물만 담을 수 있는 이 수조는, 과거에도 화재 예방에 있어 상징적인 역할에 그쳤을 뿐일 것이다. 목조 건물이 불타는 판국에 그것이 무슨 소용이랴! 옛 조선 왕조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편한 기억을 말해 주듯, 지금은 물조차 없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223쪽)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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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5-05-07 오전 9:32:11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