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동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키곤 했습니다. 만일 하느님 앞에서 거짓을 말하면 크게 분노하실 것이라고 겁을 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이 참말을 끌어내는 데는 효과가 있었습니다만, 심각한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동생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에게서 점점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원죄를 지은 인간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처분은 영원한 저주도 돌이킬 수 없는 천벌도 아닙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느님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하느님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시고는 치미는 분을 참지 못하여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신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전지(全知)하십니다. 그러니 선악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숨은 인간 앞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첫 말씀은 이러합니다.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
이 질문은 하느님의 염려를 드러냅니다. 경찰이 잠적한 범죄자를 수색하는 것이 아니라 제 딴엔 큰 사고를 치고 어딘가 숨어버린 자녀를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얘야 어디 있니? 괜찮으니 어서 나에게로 오렴.”
물론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꾸짖으십니다. 하느님은 아이가 어떤 잘못을 하든 마냥 오냐오냐하는 아버지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자녀와 갈등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실을 부정하는 거짓 온유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온유는 진실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인간의 잘못을 꾸짖으시지만, 인간을 단죄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봅시다“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창세 3,17)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는 아담과 하와(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 부조)
여기서 하느님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땅을 저주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땅의 저주는 오로지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하여 재난이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고통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비록 인간이 자초한 고통이지만, 그것을 겪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으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창세 3,21)
알몸은 연약함을 상징하고, 가죽옷은 영속적인 보호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두렁이 따위로는 알몸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직접 질긴 옷을 지어 인간을 입히십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을 거슬러도 하느님은 인간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더 큰 은총이 내립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신 일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마치 하느님께서 매정하게 인간과의 관계를 끊어내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 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이것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신 이유입니다. 얼핏 듣기에 하느님께서 자신처럼 된 인간을 질투하여 내쫓으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들어보면 사실 이것은 추방이 아니라 인간을 보호하는 조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OSV
인간은 이미 성숙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소화할 수도 없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하느님과의 사랑의 친교 안에 제대로 들어가기도 전에, 즉 감당할 수도 없는 생명의 열매마저 따 먹을 판이었죠. 영원한 삶 자체가 아니라 그 삶이 어떠한 삶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는 생명의 열매는 먹으면 안 되는 것이죠.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아서 선물로 주실 열매들이지만, 인간이 참지 못하고 스스로 따 먹으면 독이 든 과일이 될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사탄이 바란 것입니다. 사탄이 인간이 잘 되기를 바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을 보호하려는 조치로 아담과 하와를 생명나무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에덴동산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천사들에게 불 칼을 들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 단호한 조치는 하느님의 온유함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즉, 이로써 하느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하신 것, 인간을 포기하고 놓아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이 생명의 열매마저 따 먹는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온유함은 우유부단하고 물러터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글 _ 함원식 신부(이사야, 안동교구 갈전마티아본당 주임, 성서신학 박사)
1999년 사제서품 후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가톨릭대학교(Catholique de Paris)에서 2007년 ‘요나서 해석에서의 시와 설화의 상호의존성’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2017년 ‘욥기 내 다양한 문학 장르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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