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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 차례·내일은 네 차례… 끝이 아닌 ‘영원한 삶’ 시작 2024-11-20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가 1915년 조성한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 맨 앞줄 석조 십자가 좌우로 드망즈 주교를 비롯한 주교 묘역이 있다. 제대 양옆은 묘지 초기(1916~1930년) 들어선 사제와 차부제 무덤들이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 입구에 새겨진 라틴어 문구다. 이처럼 죽음은 숙명이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동시에 죽음은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끝’이 아닌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그래서 대구 성직자 묘지 석조 십자가 받침엔 또 이렇게 적혀 있다. ‘TUNC PAREBIT SIGNUM FILII HOMINIS IN COELO’.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마태 24,30)



성직자 78위 잠든 도심 속 아름다운 묘지

묘지는 대구광역시 도심 남산동 교구청 안에 있다. 붉은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인 묘지는 벤치도 있어 아늑한 공원처럼 보인다. 참배객 편의를 위해 위령 기도 책 대여함도 설치됐다.

이곳엔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를 비롯해 모두 78위가 잠들어 있다. △주교 7위 △몬시뇰 8위 △신부 61위 △차부제 2위다. 잔디 위 줄지어 늘어선 무덤은 봉분 대신 돌로 위를 덮었다. 11월 위령 성월을 맞아 무덤 앞마다 노란 국화 화분이 봉헌됐다.

 

 

11월 위령 성월을 맞아 대구광역시 도심 남산동 교구청 안에 있는 대구 성직자 묘지를 찾은 참배객 한 명이 무덤 앞에 서서 기도하고 있다.

 


1915년 조성해 ‘영남의 사도’ 안장

드망즈 주교는 1915년 묘지를 조성했다. 대구대목구가 ‘한국 가톨릭교회 두 번째 교구’로 설정된 지 4년 만이었다. 한반도 남부인 경상도·전라도 그리고 충청도 일부를 관할해 ‘남방교구’라고도 불렸다.

그해 4월부터 드망즈 주교는 묘지 인가와 용지 매입에 공을 들였다. 8월 주교관 뒤편 산 400평을 묘지터로 정했고, 곧 묘지 허가 증명서를 받았다. 10월 29일엔 묘지에 석조 십자가를 설치했다. 기초(받침)를 빼고도 비용으로 255원이 들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 6원이었다. 마침내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드망즈 주교는 묘지를 강복했다.

1916년 3월 3일 성직자 묘지에 첫 무덤이 들어섰다. 일찍이 경상도 땅에 묻혔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사제 2명의 유해가 이장됐다. 로 신부와 조아요 신부였다.

부산본당(현 부산교구 범일본당) 주임이었던 로 신부는 1902년 9월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병자성사를 주다가 전염된 탓이었다. 그를 간호하던 교리교사도 병이 옮아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드망즈 주교는 앞서 1912년 12월 로 신부 무덤을 주교관 부지로 옮겼었다. 성직자 묘지로 개발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1913년 일제가 발표한 새 묘지법이 정한 조건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자리에 마련했다.

조아요 신부는 칠곡 가실본당에서 주임으로 사목하다 1907년 1월 폐렴이 악화해 선종했다. 30세였던 젊은 사제는 임종을 지킨 대선배 로베르 신부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세요!”

‘대구의 사도’ 로베르 신부는 1877년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했다. 1882년 경상도 사목 담당자로 임명, 1886년 대구본당(계산주교좌본당) 초대 주임을 맡았다. 주교좌 계산성당을 손수 설계해 공사 감독하고, 1898년 근대 교육기관 해성재(현 효성초등학교)도 설립했다. 1922년 선종해 조아요 신부 옆에 안장됐다.
 

 

1914년 설립된 한국 교회 두 번째 신학교인 대구대목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초대 교장 샤르즈뵈프 신부 무덤.


나란히 묻힌 프랑스인 스승과 한국인 제자

묘지 조성 이후 선종해 안장된 첫 인물은 샤르즈뵈프(1867~1920년) 신부였다. 1914년 설립된 성유스티노신학교 초대 교장이다. 1920년 1월 피정에 참여한 그는 미사를 집전하다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미사 중 선종’은 생전 샤르즈뵈프 신부가 간절히 바라던 죽음이었다.

그의 바로 옆에 신학교 제자 무덤이 있다. 1923년 5월 선종한 이경만 신부다. 1922년 사제품을 받고 1년을 채 못 채우고 이곳에 한국인으로 처음 묻혔다. 이 신부는 선교지 나주를 떠나 피정을 하러 대구로 오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샤르즈뵈프 신부님처럼 피정 중 선종하는 행복을 누리고 싶다”던 바람을 이룬 셈이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정든 학교를 바라보며 나란히 안식을 취하고 있다.



첫 한국인 교구장 비롯한 여러 사제 안장

성유스티노신학교 첫 졸업생도 이곳에 잠들었다. 1918년 대구대목구 출신으로 처음 사제품을 받은 주재용 신부다. 1942년 제2대 전주지목구장으로 부임한 주 신부는 해방 직후인 1946년에 겸임으로 한국인 최초 대구대목구장(제4대)에 임명되는 영예를 안았다.

교구장은 대부분 묘지 맨 앞줄 주교 묘역에 잠들어 있다. 1938년 선종한 드망즈 주교를 필두로 △2대 무세 주교 △3대 하야사카 주교 △6대 최덕홍 주교 △7대 서정길 대주교 △9대 최영수 대주교, 그리고 서정덕 보좌 주교다.

몬시뇰과 신부 묘역에는 한국 교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거인들도 많다. ‘하느님의 종’ 김수환 추기경의 형이자 한국 가톨릭 결핵 사업의 선구자 김동한 신부, 효성여자대학교(대구가톨릭대학교 전신) 초대 총장 전석재 몬시뇰, 문답식 예비신자 교리서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저자 박도식 신부, 서강대학교 한국인 첫 총장 서인석 신부 등이다. 1970년대 초 폐허처럼 변한 묘지를 지금 모습으로 아름답게 재단장한 이종흥 몬시뇰 무덤도 이곳에 있다.
 

한 신자가 묘지 담장에 새겨진 가톨릭 군위묘원 안장 사제 23위 묘비를 읽고 있다. 2013년 8월 선종한 교구 신부부터 군위묘원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기 시작했다.


60년간 묘지에 공존한 수도자들

1915년 10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수녀원이 설립됐다. 그 뒤로 수도자들도 한동안 이 묘지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렸다. 드망즈 주교는 묘지 조성 때부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도움을 얻었다. 묘지 허가를 받을 때 일기를 보면 ‘데레사 수녀에게 감사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처음 안장된 수도자는 효성여학교 교사 아녜스(속명 김아가다) 수녀였다.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9년간 교편을 잡은 그는 1927년 3월 졸업식 하루 전에 선종했다. 그 뒤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도자 31위가 안장됐다. 수녀회는 1990년 가톨릭 군위묘원으로 모든 유해를 이장했다. 군위묘원은 대구대교구가 1982년 조성한 곳이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도 1989년 유해를 사수동 본원 묘지로 이장했다. 1970년 9월 선종한 독일 출신 임힐데 히베르 수녀를 시작으로 모두 8위였다. 수녀회는 북한 공산 정권이 원산수녀원을 강제 폐쇄하자 1951년 남하해 대구에 정착했다.



2013년부터 군위묘원에 선종 사제 안장

이후 수도자들이 떠난 자리를 사제들이 채워나갔다. 2013년 8월 선종 신부부터는 군위묘원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그곳에 안장된 사제 23위 묘비가 대구 묘지 담벼락에 새겨져 있다. 그중 주교도 1위 있다. 2021년 3월 14일 선종한 제8대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다. “나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유언을 따랐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24-11-20 오전 9:52:00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