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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수도원 숙소에서 손 내밀면 닿을 듯한 한양도성 ‘혜화문’ 성벽 | 2024-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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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한양도성 성벽과 성문 훼손 한양도성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 1396년부터 쌓기 시작해 세종 임금이 1422년 중수했다. 처음에는 돌과 흙을 섞어 성을 쌓았으나 세종이 전부 돌로 개축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보수되고 또 새로 쌓아 시기와 지형에 따라 성벽 모양이 다양할 뿐 아니라 높이도 5~10m까지 차이가 난다. 한양은 8개 산이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다. 안쪽 동편에는 ‘낙산’으로 불리는 타락산이, 서편에는 인왕산이, 남편에는 ‘남산’으로 더 알려진 목멱산이, 북편에는 ‘북악산’이라고도 하는 백악산이 감싸고 있다. 그 바깥으로 동쪽에 용마산, 서쪽에 덕양산, 남쪽에 관악산, 북쪽에 북한산이 있다. 조선은 안쪽 4개 산의 능선을 따라 18.6㎞에 달하는 한양도성을 쌓았고, 성곽에 흥인지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숭례문(남대문)·숙정문(북대문) 사대문과 혜화문(동소문)·소의문(서소문)·광희문(남소문)·창의문(북소문) 사소문을 냈다. 안타깝게도 한양도성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훼손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1907년 성벽처리위원회를 두고 요시히토 황태자 방문을 이유로 숭례문 성벽 철거를 시작해 서대문·서소문 등 여러 성문을 허물었다. 첫 번째로 성벽 철거의 수모를 겪은 숭례문은 그나마 임진왜란 때 왜병이 이 문을 통해 한양을 입성했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2월 22일 서울에서의 첫날을 이렇게 적고 있다. “붉은 겨울 해가 수도원 동쪽 정원과 손 내밀면 닿을 듯한 성벽 위로 서서히 떠오르며 내가 묵은 집 위로 인사를 하더니,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들을 건너 옮겨간다. 산들은 당당하게 반원을 그리며 발아래 수도를 감싸 안았다. 나는 한국에서의 첫 밤을 이 집에서 달게 보냈다. 멀리 서쪽으로 북한산이 구름 속에 솟아 있다. 성벽은 북한산을 감돌아 북으로 뻗었다가 다시 남으로 이어진 봉우리들을 따라간다. 돌밭은 산기슭에서 위쪽으로 힘겹게 펼쳐지고 작은 소나무 숲들은 민둥산을 내려온다. 잔가지 덤불들이 아침 햇살로 붉게 타오르며 이 사이를 가른다. 언 나뭇잎들이 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떨었다. 사이사이로 검은 초가집들이 겨울잠에 빠져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61쪽) 성 베네딕도회, 1909년 백동에 수도원 세워 베버 총아빠스가 수도원 숙소에서 손 내밀면 닿을 듯하다고 적은 성벽이 바로 동소문인 ‘혜화문(惠化門)’ 성벽이다.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교사와 기술자 등 고급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1909년 한국에 진출한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수도자들은 백동(현 혜화동성당과 가톨릭대 신학대학)에 수도원을 세웠다. 1396년 한양도성 축조 때 흥덕동 뒷산과 타락산 사이 고개에 세워진 혜화문은 한양의 북쪽 관문이다. 한양에서 혜화문을 빠져나와 미아리 고개를 지나 양주·포천을 거쳐 강원도와 함경도로 갔다. 이 문으로 동북 지역 사람들과 여진족이 주로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이라 이름 지어졌는데, 1483년 성종이 창경궁을 짓고 정문인 동문을 홍화문이라 불러 1511년 중종이 혼란을 막기 위해 혜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임진왜란 때 불탄 혜화문 문루는 소실 152년 만인 1744년 영조의 명으로 재건됐다. 혜화문 문루는 안타깝게도 1928년 일본군에 의해 또 한 번 허물어졌다. 일제가 동소문 고개를 잘라 새 도로를 내면서 영원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한국 여행 기간 겸재 화첩을 매입한 이유로 베버 총아빠스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겸재 정선은 한양 진경으로 말년에 문루가 없는 혜화문 전경을 그렸다. 높다란 능선을 따라 성 안쪽 왕솔이 우거진 타락산(낙산) 봉우리가 지금의 가톨릭대 신학대학과 혜화동 자리다. 곧 베버 총아빠스가 1911년 한국에 왔을 때 그가 묵었던 백동 수도원 자리다. 1794년 정조 21년 4월 「일성록」에는 타락산에 심은 소나무가 하백동(혜화동 남쪽) 뒷산에는 잘 뿌리가 내렸으나 상백동(혜화문 북쪽) 뒷산에는 역군들이 힘든 일을 하기 싫어 소나무를 심지 않고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다 던져둬 땅이 많이 비어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겸재 그림의 혜화문 남면에는 소나무가 무성하지만 북면에는 별로 없다. 베버 총아빠스, 한양도성 성곽 길 산책 즐겨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혜화문을 주제로 세 장면의 사진을 남겼다. 하나는 한양도성 밖에서 혜화문을 찍은 사진이다.<사진 1> 사진은 주 전경으로 찍힌 동소문과 문루에 ‘혜화문’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현판, 담쟁이 덩굴로 휘감긴 성벽, 그 벽 아래 초가로 지은 가게를 담고 있다. 오른쪽 성벽 아래에는 가게 주인인 듯한 한복 입은 남성이 햇볕을 쬐고 있고, 그의 아들인 듯한 한 아이가 지루함을 달래듯 무심히 뛰놀고 있다. 또 다른 사진은 한양도성 안쪽에서 촬영한 혜화문이다.<사진 2> 혜화문으로 가는 길 양옆으로 초가들이 즐비하다. 이색적인 것은 초가들이 흙벽이 아니라 모두 돌벽이다. 산과 산을 이은 고갯길 성문이어서 그런지 제법 가파르다. 경기 동북부와 강원도·함경도로 가는 관문답게 왕래가 잦다. 장옷을 입은 여인뿐 아니라 인력거에 막 오르는 젊은 아낙, 등짐을 진 말을 끌고 가는 마부들과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지게꾼, 머리에 한가득 짐을 이고 있는 장년, 중국식 복장을 한 청년들, 혼자 무언가를 찾는 듯 땅바닥을 보고 있는 어린 소녀와 대문간에 걸터앉아 이를 지켜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평화롭다. 마지막 장면은 혜화문 성곽에서 촬영한 사진이다.<사진 3> ‘혜화문과 성곽’이란 제목의 이 사진은 아마도 베버 총아빠스가 혜화문 남면 성루에서 북면을 향해 촬영한 듯하다. 굽은 형태의 성곽 오른편이 혜화문 바깥쪽이고 그 반대편이 한양도성 안쪽이다. 일성록 기록과 겸재의 그림처럼 혜화문 주변으로 소나무가 제법 무성하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민둥산이다. 원경의 산세로 보아 북악산 줄기와 삼각산인듯하다. 문제는 혜화문 안쪽을 촬영한 <사진 2>를 보면 성벽까지 초가가 즐비한데 <사진 3>의 성곽 안쪽 부분은 초가 대신 수풀로 우거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진은 제목과 달리 ‘혜화문과 성곽’을 촬영한 것이 아니다. 누가 이 사진의 제목을 달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북대문인 ‘숙정문’ 성루에서 촬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베버 총아빠스는 ‘숙정문’에 올라가 “고갯마루를 타고 앉아 좌우 능선으로 톱니 모양의 성벽을 뻗어 보낸다”라고 기록했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88쪽) 베버 총아빠스는 혜화문을 중심으로 한양도성 성곽 길을 산책하는 걸 무척 좋아한 듯하다. “오후에 성벽 앞을 잠시 산책했다. 초가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그 뒤로 어두운 총안이 뚫린 오래된 화강암 성벽이 어른 키 높이로 지형을 따라 뻗어 있다. 무너진 성벽이 보수되어 시든 단풍나무의 불타는 갈색 사이로 푸르게 빛난다. (?) 뒤쪽 먼 언덕 위로 다시 성벽이 보였다. 성벽은 소나무 숲 너머 북쪽으로 계속 나타났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68쪽) 베버 총아빠스가 묵었던 백동수도원, 곧 가톨릭대 신학대학은 2018년 교황청이 승인한 ‘천주교 서울 순례길’의 순례지다.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따라 이곳까지 순례해 보길 추천한다. 이 길에서 낙산 성곽 길을 만날 수 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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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11-13 오전 10:52:09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