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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 기도 이야기] 기도의 길잡이인 마태오(마태 6,5-8; 18,19-20) | 2024-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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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산상설교(5~7장)의 한가운데 주님의 기도를(마태 6,9-13) 배치하고 그의 서두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마태오는 이렇게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특성을 드러내면서, 당시 유다교의 지도층이었던 바리사이들의 기도와 구분을 시도합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환경에서 쓰인 디다케는 다음과 같이 기도를 가르칩니다. “너희의 단식은 위선자들의 단식과 같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한다. 하지만 너희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서 주님께서 명하셨던 것처럼 너희는 위선자들처럼 기도하지 마라.” 여기서 단식과 기도 등 외적으로 표현되는 신앙의 실천이 사회 안에서 신앙 공동체의 신원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오 공동체는 바리사이들이나 디다케가 쓰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달리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행동을 통해서 사회 안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마태오 복음서는 기도를 개인의 것으로 변화시키고 유일하신 분과의 친밀함을 기도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제시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과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허풍을 떨거나 잘난 체를 하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쓸데없는 일입니다. 입에는 오르지만, 마음에는 없는 기도는 의미도 재미도 없고, 그런 기도를 오래 할 수도 없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는 자식과 같이 그분을 신뢰하는 이만이 하느님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직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몇 사람이 있어야 예배가 성립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많은 토론을 벌였습니다. 정통 유다교에서는 남자 10명을 정족수로 여깁니다. 여기에 마태오는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중요한 것은 숫자나 양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 또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지닌 질입니다.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튼튼한 공동체, 보이지 않게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께 기도하는 공동체, 그 공동체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분이 바로 기도가 이루어질 정족수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 기도하는 것, 아니면 둘이나 셋이 모여 기도하는 것, 아니면 주일에 공동체가 모여 성대히 미사를 거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맞습니까? 하느님을 푸근한 아버지로 느끼는 이에게는 이 모두가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자신의 소원을 앞세우는 이들에게, 채무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빚쟁이처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압박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이들에게 그중 어떤 것도 큰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글_신정훈 미카엘 신부 서울대교구 해외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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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11-13 오전 6:12:10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