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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보내주십시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이어돈 신부(상) | 2024-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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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돈 신부(리어던 마이클 조셉·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는 2011년 제주도에 있는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이하 이시돌협회) 이사장이 됐다. 1954년 제주도에 내려와 성 이시돌 목장 설립 등 사목을 시작한 고(故) 임피제 신부(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사업 일선에서 은퇴하자 그의 곁을 지키다가 임 신부의 뒤를 이은 것이다. 놀랍게도 첫 제주 방문은 신부가 아닌 수의사이자 선교사로서 했던 이 신부의 유쾌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2회에 걸쳐 들어본다.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나는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죄인이에요. ‘예수님께 사랑받은 죄인’입니다.” 이어돈 신부는 자신을 한껏 낮춰 소개했다. “아까 말과 함께 사진 찍었는데 나도 54년생 말띠”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은 이 신부는 “사제인 건 중요하지 않고 세례받은 게 중요하다. 세례 때 이름인 ‘미카엘’ 대천사를 존경한다”고 전했다. 이 신부에게서 이사장직도, 사제직도 아닌 본연의 모습을 중시하는 소탈한 면모가 엿보였다. “한국엔 세속적인 이유로 왔다”는 이어돈 신부는, 시작은 미미하지만 앞날은 성대해질 것이라는 성경 구절처럼(욥 8,7 참고) 사실 영국에서의 술자리를 계획하다가 한국에 오게 됐다. 수의학과 학생 시절, 런던의 같은 수의학과 학생들과 교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에서 진행되는 외교관 면담 소식을 듣게 되고, 아일랜드에서 영국까지의 교통비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예상에 지원을 준비했다. 이때 추천서를 부탁한 수의학과 학장이 바로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학생 출신이었다. 학장은 이 신부에게 한국에 파견돼있던 임피제 신부 이야기를 꺼냈고, 이 신부는 1978년 얼떨결에 한국, 그것도 당시만 해도 외딴섬이었던 제주도에 도착한다. “한국말을 잘 몰랐던 덕분에 제주에 와서야 예수님을 멋쟁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어릴 적 유아 세례를 받고 계속 성당에 다녔지만 제주도에 2년 반 머물렀을 때, 그제야 예수님을 새롭게 알게 된 것 같았다. 사실 한국말로 이뤄지는 임 신부의 강론 시간이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그렇게 지루했다. 그래서 이 신부는 영어로 된 매일미사책의 복음 부분을 계속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가나안의 혼인 잔치에 술이 왜 떨어졌을까? 술꾼으로 소문났던 예수님과 제자들, 친구들 때문 아니었을까? 성모님이 예수님께 부탁을 한 것도 그런 아들이 창피해서 그랬던 거 아닐까?’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함께 어울리고 싶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어느 시대이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이 신부는 사제 성소를 고민하게 됐다. 제주, 내가 있을 곳에 사제로 다시 오다 이 신부는 2년 예정으로 왔던 제주도에 정이 들어 2년 반을 머물렀다. “그땐 제주도를 떠나면 다신 못 돌아올 줄 알고 계속 미뤘다”는 이 신부는 이렇게 다시 돌아올 줄 알았으면 땅을 아주 싸게 사놨을 거라는 특유의 농담도 잊지 않았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를 통해 신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을 때 지도 신부가 이 신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이 신부는 제주도 가고 싶어서 사제에 지망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우리는 현재 17개국에 사제를 파견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갈 수 없을 수 있다”였다. 이 말을 들은 이 신부는 며칠 동안 잠도 못 이뤘다. 하지만 이내 ‘예수님을 위한 길에 조건을 달지 말자’는 결심이 섰다. 한국을 꼭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한국에 오게 됐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이었던 것 같다고. “제주도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어려움도 많이 있었지만 어려움 안에서 행복을 느꼈습니다. 여기가 바로 내가 있을 자리라고 여겨졌죠.” 제주살이 처음엔 음식도 안 맞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 외롭고 힘들었다. 그러다 차츰 한국말을 배우면서 한국 문화를 더 이해하게 되고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들도 생겼다. 2004년 그토록 그리던 제주도에 사제로 파견된 이어돈 신부. 이시돌협회와 가까이 있는 금악본당 주임신부를 맡으며 임 신부와도 가까이 지내게 됐다. 거동이 불편해진 임 신부의 여러 자리에 동행하며 수행하기도 했다. “임 신부님이 저에게 성 이시돌 피정의 집을 도와달라고 하시더니 담당은 본인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알겠다고 하고 그럼 대신 미사 할 때나 고해성사 줄 때마다 돈을 받겠다고 했죠.” 임 신부와의 일을 회상한 이 신부는 역시 장난스러운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임 신부는 자리에서 물러난 후 뒤를 이은 이 신부에게 일절 조언이나 개입을 하지 않았다. 정말 존경스럽고 감사한 부분이라고. 이시돌협회가 생긴 초창기에는 임 신부의 사업이 한국의 발전을 이끌었는데 이 신부가 맡고 있는 지금은 한국 산업이 이미 앞질렀다고 느낀다. 그런 이시돌협회에는 또 다른 사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앞서가지 않더라도 갈 데 없는 힘든 사람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고, 그들에게 적법하고 공평하게 대하는 곳으로 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박효주 기자 phj@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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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11-13 오전 6:12:10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