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그랬다. 내가 빨치산의 딸만 아니었다면 백퍼 보수였을 거라고.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만 부정은 못 하겠다. 음식만 해도 그렇다. 나는 새로운 먹거리를 받아들이는 게 어렵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떡볶이라는 걸 팔았다. 구례서는 보지 못한 음식이었다. 떡과 고추장, 익히 아는 재료인데도 벌건 떡, 입에 넣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몇 년 지난 뒤에야 먹어볼 용기를 냈다. 맛있었다! 파스타는 면도 낯설고 소스도 낯설어 받아들이기까지 십 년 넘게 걸렸다. 토마토 스파게티나 알리오 올리오는 요즘 집에서도 만들어 먹는 나의 최애음식 중 하나다. 낯설어도 언젠가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치로 알면서도 나는 번번이 새로운 음식 앞에서 낯을 가린다.
나는 모든 낯익은 게 좋다. 어려서부터 늘 먹어온 호박잎을 오늘도 먹고, 늘 보던 친구와 오늘도 놀고, 늘 가던 데를 오늘도 간다. 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영국이었다. 처음이라 좋았다. 거기를 가고 또 갔다. 물론 전 세계에 가지 않은 곳이 무수히 많다. 새로운 데 갈 용기를 내기보다 가서 좋았던 데를 또 가고 싶은 욕망이 더 큰 모양이다.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것, 이게 보수의 핵심 아닌가? 빨치산의 딸로 태어난 게 천만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친구가 또 그랬다. 나는 가난한 공주라고.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니 벌써 송이 생각이 간절하다. 초가을이면 아빠는 나를 위해 반내골 뒷산, 그러니까 백운산 자락을 샅샅이 헤집고 다녔다. 내가 환장하는 송이를 찾기 위해서다. 사람 보는 눈썰미가 뛰어났던 아빠는 송이 찾는 눈썰미는 젬병이었다. 아빠 눈에 띈 송이는 십중팔구 갓이 다 펴 아빠 얼굴보다 컸다. 질기긴 해도 향은 더 진했다. 그걸 숭숭 썰어 넣고 끓인 소고깃국을 먹어야 비로소 가을인가 보구나,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빠가 캐온 산도라지, 산더덕도 우리 집 밥상에 흔히 올랐다. 내 팔뚝만 한 산더덕 껍질을 벗기면 온 동네에 쌉싸름한 더덕향이 진동을 했다. 요즘 더덕은 명함도 못 내밀 향이다. 아빠가 캐온 산더덕을 홍두깨로 잘근잘근 두들기고 엄마가 직접 만든 고추장을 발라 숯불에 구우면 캬, 소주를 부르는 맛이었다. 어린아이라 소주 곁들이는 호사는 누리지 못했지만, 세 식구가 따뜻한 아궁이 앞에 쭈그려 앉아 손으로 쭉쭉 찢어 먹던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요즘 재배한 더덕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내 기준에서 그건 더덕이 아니니까.
언젠가 익숙한 더덕향이 시장통에 진동을 했다. 그 향에 홀려 겁 없이 가격을 물었다. 더덕 댓 개에 삼십오만 원! 고민도 호사였다. 입맛만 다시며 돌아설밖에. 이러니 가난한 공주가 맞긴 맞다. 가난하다는 것도, 공주라는 것도.
친구가 가난한 공주라고 노상 놀리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공주의 특징이 뭔가. 모두가 떠받드니 제가 잘난 줄 아는 게 공주다. 내가 그렇다. 빨치산 엄마는, 공부 못한 게 한이었던 엄마는, 공부만 잘하라며 딸이었던 나를 떠받들어 키웠다. 뭘 하든 엄마는 말했다.
“우리 딸이 최고다!”
엄마는 요즘도 걸핏하면 그런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우리 딸이 대한민국에서 젤로 똑똑허다.”
젤로 똑똑하기는 개뿔. 그렇게 키웠으니 내가 이 모양이지.
며칠 전 하나로 마트에 갔다. 인구 이만오천의 구례에 마트는 오지게 많다. 농협 하나로 마트, 축협 하나로 마트, 식자재마트, 개인이 운영하는 대형 마트도 두어 개 된다. ‘빨치산의 딸만 아니었다면 백퍼 보수’인 나는 물론 처음 간데만 간다. 다른 데도 가보긴 했다. 바로 포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어서다. 나는 마트에 가기 전 동선을 미리 계산한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최소한의 걸음으로 물건을 획득할 동선을 짠 뒤에야 나는 마트에 들어서고, 순식간에 장을 본다. 새로운 물건에 한눈을 파는 일도 없다. 새 물건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
계산대의 상황을 재빨리 스캔한 뒤 나는 줄을 선다. 간혹 조금 긴 줄에 설 때도 있다. 계산원에 따라, 물건을 올리고 꾸리는 손님에 따라 속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단골이라 오래된 직원의 계산 속도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마트의 대우가 그닥 좋지 않은지 계산하는 직원들이 자주 바뀐다. 이럴 때 판단에 착오가 생기기도 한다. 며칠 전이 그랬다. 계산대가 두 개만 열려 있었고, 두 사람이 물건을 계산대에 올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계산원의 속도를 보지 못한 채 물건의 양만으로 줄을 선택해야 했다. 어느 쪽이든 내 앞에 한 사람뿐이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랴, 방심한 게 문제였다. 참을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나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계산원은 물건마다 바코드를 찾느라 한참이나 시간을 낭비했고, 아무것이나 덥석덥석 손에 잡히는 대로 바코드를 찍었다. 그 결과, 상추와 열무, 콩나물, 쪽파, 달걀 등이 먼저 계산되었고, 주방세제와 치약, 음료수, 소주 등은 아직 계산 전이었다. 손님은 장바구니를 열어놓은 채 무거운 물건이 계산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야 야들야들한 채소가 뭉개지지 않고 달걀이 깨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계산원은 바코드를 찾는 데만 집중했다. 계산된 물건들이 장바구니에 들어가지 않은 채 자꾸 늘어났다. 내 뒤로 줄도 길게 이어졌다. 나는 속이 터졌다. 머리는 뒀다 어디에 쓰려고 저러나,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그때였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 계산대로 쑥 넘어왔다. 내 뒤에 서 있던 할머니의 손이었다. 할머니는 계산대에 있던 주방세제를 집어 계산원의 손에 들려주며 말했다.
“무거운 것부텀 계산허씨요. 푸성귀부텀 계산을 허먼 짐을 워치케 싸겄소? 긍게 줄이 질어지지라.”
정신없이 계산 중이던 계산원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춥다 싶을 만큼 에어컨이 쌩쌩 돌아가고 있었는데 땀에 젖은 계산원의 이마에 머리카락 몇 올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처음으로 손을 멈춘 계산원이 계산대 전체의 상황을 휘둘러 보고는 해맑게 환히 웃었다.
“그러네 요이.”
“첨인갑소?”
“예. 첨이라 정신이 한나도 없그마요.”
나를 나무란 것도 아닌데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계산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도망치듯 마트를 나온 뒤에야 내 부끄러움의 이유를 깨달았다. 어느 소설의 후기에 젊은 날의 오만을 반성한다고 쓰기도 했는데 나는 여전히 오만한 사람이었다.
그 계산원에게 필요한 건 말 없는 비난이 아니었다. 무거운 것부터 싸는 게 좋다는 말 한마디면 달라질 일이었다. 그런데 그 쉬운 말을 나는 왜 하지 못했을까? 그 계산원의 머리가 좋지 않을 거라는 지레짐작과 머리가 좋지 않은 건 열등하다는 편견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건 그래도 내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지는 않는다는, 알량한 허위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아마 평생 농사만 지어왔을 것 같은 할머니는 나와 달리 편견이 없었다. 처음이라 그럴 수 있고, 처음이면 누구나 그럴 수 있고, 어떤 이유로든 일을 잘 못하면 알려주면 된다 생각했기에 스스럼없이 내가 맘으로만 생각한 말을 입 밖으로 꺼냈으리라. 겨우 이 정도인데 대한민국에서 젤로 똑똑하다고? 젠장.
인구 이만오천의 구례만 해도 저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구례 내려와 배운 것 - 그러니까 문학박사인 내가, 학교 문턱도 못 밟은, 혹은 중고등학교 때까지 필시 나보다 공부를 못했을 구례 사람들에게 배운 것을 쓰자면 책한 권도 모자란다. 그래도 주변에 스승들이 구례 산등성이마다 들어찬 밤나무만큼이나 많으니 복 받은 인생이라고 해야 할지 어쩔지, 입맛이 쓰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계산원의 이마에 달라붙어 있던 땀 젖은 머리카락이 잊혀지지 않는다. 처음이라 얼마나 긴장했으면 그랬을까. 그런 이를 무거운 것부터 계산할 머리 하나 없다고 속으로 욕했던 내가 아직도 부끄럽다. 더 오래 구례 사람으로 구례에 스며들면 이 돌덩이 같은 오만을 내려놓을 수 있으려나….
글 _ 정지아 (소설가)
소설가.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고,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등이 있다.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삽화 _ 김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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