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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2024-11-05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집에서 움츠려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성경을 읽으면 어떨까요. 날이 추워 밖에 나가지 않을 때는 성경에 있는 먼지라도 털어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사제관에서 강아지 두 마리와 살고 있는데 ‘호두’와 ‘까기’입니다. 이 녀석들과 가끔 숨바꼭질할 때가 있는데, 내가 숨어서 ‘호두야~’ 하고 불러 나를 찾아보라고 하면 요 녀석은 멀뚱거리기만 합니다. 반면 ‘까기’ 이 녀석은 ‘까기야~’ 하고 부르면 어떻게든 나를 찾으려고 꼬리를 흔들고 왔다 갔다 하다가 기어코 나를 찾아냅니다.

하느님께서도 오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호두’ 강아지인가요? 아니면 ‘까기’ 강아지인가요. 아~ 개를 닮고 싶지 않다구요.(신자들 웃음) 호두가 나를 찾지 않고, 까기가 나를 찾는다고 해서, ‘호두’가 싫고, ‘까기’가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의젓한 ‘호두’와 에너지 넘치는 ‘까기’ 둘 다 사랑합니다. 각자의 예쁨이 있거든요.

우리도 하느님을 섬기는 방식은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복음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참조)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근원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신자들 대답하지 않음) 답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신자들 웃음) 또 이웃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다른 사람 팔이 부러진 것보다, 내 손톱 밑에 가시가 더 아픈데, 과연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시간 및 숫자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일, 용서하는 일은 숫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하느님 사랑이 100%라면 우리의 사랑을 몇 %로 표기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완전한 이웃 사랑이 100%라면 우리의 사랑을 몇 %로 표기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호두와 까기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나를 따르고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나만이 갖는 고유한 하느님이 내려주신 능력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과연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정량화해서 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 표준은 없습니다. 만약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느님의 사랑의 절대적 표준이라면 우리 모두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가진 것 모두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살아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인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는 우리 각자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호두와 까기가 나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세상에 다양한 하느님의 선물이 있듯, 우리도 각자 독특하고 유일하고 또 특별한 존재로서 이 세상에 왔고 그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40년 전쯤 신학생 때의 일입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왔는데 한 신학생이 “와~!”라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제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노을을 봐. 정말 예쁘지 않아?” 그래서 제가 노을을 봤는데, 그냥 늘 바라보았던 평범한 노을이었습니다. “저 노을은 어제도 있었어.” 그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어제랑은 다르지. 오늘 노을은 유난히 예뻐.”

이후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웬만한 꽃만 봐도 “와~!”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만 봐도 “와~!” 그렇게 연습을 하다 보니 제 마음이 약간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꾸는 일은 어쩌면 작은 일을 반복해서 실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말을 하는 것, 좋은 생각을 하는 것, 좋은 표정을 짓는 것. 이런 것으로부터 이웃 사랑이 시작하고, 하느님 사랑이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요. 가난한 이들에게 전 재산을 나눠주는 것. 매일 10시간 넘게 기도에 매달리는 것.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의 몫은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가장 작은 것부터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그릇 안에서 작은 것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지금이 하느님을 사랑할 때입니다. 지금이 이웃을 사랑할 때입니다. 아멘.

*이용삼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시려면 유튜브 검색창에서 ‘이용삼 Joseph 신부’를 검색하면 됩니다.


글 _ 이용삼 신부 (요셉, 수원교구 백암본당 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4-11-05 오전 8:32:00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