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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31주일 | 2024-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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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과 부활에 관한 논쟁(마르 12,18-27)을 벌이신 이후에 율법학자 한 사람과 ‘첫 번째’ 계명에 관한 대화를 나누십니다. 어느 한 율법학자는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논쟁을 옆에서 듣고 있었고, 잠시 틈을 이용하여 예수님께 다가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 물음에는 토라의 요약, 곧 모든 율법 조항이 도출되는 하나의 원리를 찾고자 했던 랍비들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율법학자는 모든 계명 중에서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쉐마’(‘너희는 들어라’라는 뜻: 신명 6,4-9)를 시작하는 구절, 곧 신명기 6장 4-5절을 인용하여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30) 이 조문은 신명기에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가장 잘 요약한 구절로서 모든 율법의 근원이자 믿음의 대상인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포함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계명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고대 이스라엘의 기본 교리와 규범을 알려주면서, 하느님을 헌신적으로 전인적 차원에서 사랑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쉐마를 머리 속에 암기해야 하고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바쳐야 합니다. 집 안과 집 밖, 쉴 때나 일할 때 거듭하여 계명을 암기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쉐마를 암기하여 바침으로써 선택된 민족, 곧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듭하여 확인합니다. 마르코 복음 12장 29-30절에 따르면, ‘하느님 사랑’이라는 요구는 ‘하느님의 유일성’이라는 신학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비교: 마태 22,37; 루카 10,27)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답변으로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이 계명은 이른바 성결 법전(레위 17-26장)에 속하는 규범으로서 한 분이신 하느님처럼 이웃, 곧 동료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을, ‘둘째’ 계명으로 이웃 사랑을 열거하고 계시지만, 이웃 사랑에 대한 언급 후에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라는 표현을 덧붙이시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을 연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 못지않게 중요한 계명이며, 이 두 계명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유학 시절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순례 여정의 후반부에 예루살렘 순례가 포함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통곡의 벽을 방문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모습은 특이한 장신구를 두르고 기도하는 남자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장신구는 ‘성구갑’이라고 부르는데, 조그만 말씀 상자와 두 개의 끈으로 구성된 기도 용품입니다. 유다인 남자들은 상자 하나를 이마에, 다른 하나를 왼팔 심장 가까운 곳에 끈으로 매달고 기도를 바칩니다. 이들은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문 중 하나인 ‘쉐마’를 종이에 적어 작은 상자에 넣은 다음 이마에 묶었고, 심장에 닿는 왼쪽 팔뚝에도 끈으로 매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신명기 6장 8절(“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의 말씀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성구갑을 넓게 만들며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걸 지적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신구는 유다인들이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신명 6,5-6)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견뎌야 했을 시련과 고통의 세월에도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던 데에는 ‘성구갑’도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유다인들의 전통은 누군가에게는 유별나고 유난스러운 행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이러한 장신구를 두르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위선자’라고 부르며 그들을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구에게는 그들의 모습이 신앙의 모범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신 신앙을 지켜낸 민족입니다. 유다인들이 강대국 사이에서 오랜 질곡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종교 혼합주의의 유혹에서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한 분이신 주님을 하느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하느님께 일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내어드리는 유다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각자의 마음과 자세, 그리고 우리의 실천은 어떠했는지 되돌아보는 하루를 보냅시다. 한 분이신 주님께 우리 각자의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의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합시다.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사랑할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두어라.”(신명 6,4-6)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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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10-30 오전 9:12:17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