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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선교사가 본 100년 전 조선의 모습 | 2024-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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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선교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 한자어 ‘사진(寫眞)’을 우리말 그대로 옮기면 ‘진실된 것을 베끼다’라는 뜻이다. 곧 인물이나 사물의 형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풀이다. 영어로는 ‘Photography’라고 한다. 이는 헬라어 ‘φωτοs(포토스, 빛)’와 ‘ζραφη(그라페, 그림)’의 합성어로 우리말로 ‘빛으로 그린 그림’ 또는 ‘빛으로 그림 그리기’로 풀이된다. 하지만 사진은 낱말 뜻처럼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필름이나 파일에 담는 것은 아니다. 사진가의 시선으로 본 피사체만이 그 프레임 안에 담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은 결코 피사체를 객관적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사진가의 주관적인 감정이입이 된 피사체만을 담는다고 하겠다. 앞으로 연재할 사진들은 한 세기 전, 곧 1920년대에서 1930년대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선교사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본 사진들이다. 그들의 시선은 단순하다. ‘복음 선포’와 ‘선교지 문화에 대한 개방성’이다. 이들이 조선 땅 구석구석을 돌며 우리 민족의 생활 풍속을 사진으로 담은 까닭은 복음을 전하는 이와 복음을 수용하는 이가 서로 많은 영향을 받기에 상대 문화에 대한 존중과 개방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진들은 조선으로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훌륭한 교육자료였다. 선교사들은 조선으로 오기 전부터 사진과 영상을 통해 우리 문화를 누리고, 우리 심성에 맞게 하느님을 선포하기 위해 불교와 민간 무속신앙을 이해하고, 한국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심성을 배양했다. 이는 선교 베네딕도회인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 특별한 정신이기도 하다. 선교 베네딕도회가 이러한 전통을 쌓아가게 하는 토대와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이가 바로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총아빠스다. 그는 선교지 토착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깊이 이해하려는 지적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선입견 없는 관용의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관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한다. 베버 총아빠스, 여행기·기록 영화도 제작 제1차 한국 방문은 1911년 2월 21일부터 6월 25일까지 약 4개월 동안이었다. 그는 서울 일대와 경기도·충청도·평안도의 명소 및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지역을 방문했다. 이 여행에서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 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일제에 의해 소중한 문화가 소멸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했다. 이를 너무나 안타깝게 여긴 그는 한국의 역사와 사회·문화와 종교, 선교 역사를 독일과 유럽 사회에 전달하기 위해 1915년 여행기 「고요한 아침의 나라」(Im Lande der Morgenstille)를 출간했다. 468쪽에 달하는 이 책에는 글과 함께 300여 장의 사진과 직접 그린 수채화와 스케치·지도 등을 담았다. 여행 중에 적은 일기를 바탕으로 저술된 이 책은 1910년대 중반 한국 문화를 유럽에 자세하고 깊이 있게 알렸다는 점뿐만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높은 민속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독일 뮌헨대학교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베버 총아빠스의 제2차 한국 방문 기간은 1925년 5월 14일부터 9월 27일까지였다. 1911년 제1차 방문 때 이미 일제에 의해 한국 문화가 말살되고 있음을 목격했던 그는 영상 카메라를 들고 방한해 기록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 제작은 베버의 한국 문화 보존 업적 가운데 가장 높게 평가된다. 이때 촬영한 필름으로 제작한 영화가 ‘한국의 결혼식(Eine koreanische Hochzeit)’과 ‘고요한 아침의 나라(Im Lande der Morgenstille)’이다. ‘한국의 결혼식’은 1920년대의 서민 결혼식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 박물관 수장고에는 당시 신랑·신부와 하객들이 입었던 혼례 예복들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이 영화의 촬영 장소는 함경남도 안변군 소재 내평성당이다. 베버 총아빠스는 본당 주임 카누토 다베르나스 신부의 도움으로 갓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후한 사례비를 주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시 결혼식 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당시 서울 일원과 농업·수공업·춤·농악·미신·혼인·장례·불교·금강산 풍경 등 한국 문화 전반에 걸친 주제들과 선교사들의 활동을 담은 종합편이다. 특히 서민의 일상을 서사적으로 표현했다. 짚신 삼기·베틀 짜기·옹기 굽기 등 수공업 분야의 손놀림을 정교하게 촬영한 이 영화는 독일 문화인류학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 영화는 1920년대의 조선 풍속이 수록된 최초의 35㎜ 무성 기록영화라는 데 그 의의가 크다. 1927년 6월 3일 뮌헨 인류학박물관에서 이 영화가 최초로 상영됐고 언론의 좋은 평을 받았다. 이 영화는 1927년부터 1930년까지 독일 남부 100여 개 마을과 바이에른 주·헤센 주·라인란트-팔츠 주 인문계 고등학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상영됐다. 사라져가는 한국 향해 ‘대한 만세’ 작별인사 아울러 베버 총아빠스는 1925년 6월 2~12일 카누토 다베르나스 신부 및 헨켈씨 부부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후 1927년 독일에서 「한국의 금강산에서」(In den Diamantbergen Koreas)를 출간했다. 이 책에 그 유명한 ‘겸재화첩’ 속 금강산 그림 세 점이 흑백으로 실려 있다. 베버 총아빠스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마지막 장 조선을 떠나던 날의 이야기에 ‘대한 만세(Taihan manse)’라는 제목을 달았다. “우리는 사라져가는 이 나라를 향해 애써 ‘대한 만세’라고 작별인사를 보낸다. 한 국가로서 이 민족은 몰락하고 있다. 마음이 따뜻한 이 민족에게 파도 너머로 작별 인사를 보낸다. 나의 심정은 착잡하다. 마치 한 민족을 무덤에 묻고 돌아오는 장례 행렬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는 또 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다음과 같이 자막을 달았다. “1911년 내가 그리도 빨리 사랑에 빠졌던 한국과 이별할 때 작별의 아픈 마음으로 대한 만세를 불렀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넘게 지났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국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와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사장 김정희)은 2021년부터 2022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사진을 조사 연구해 1874점의 사진을 고화질 파일로 담아왔다. 두 기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번 연재를 시작한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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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08 오후 5:09:00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