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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독립 | 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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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은 자녀에 대한 한없는 희생과 헌신을 의미하고 여성의 덕목으로 해석돼 왔다. 자녀 사교육에 대한 열정도 어머니의 역할에서 비롯해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여성은 자신보다 자녀의 성취를 위해 애쓸 때 덜 비난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모성도 가족의 성공, 계층 유지와 관련돼 있으니 이기적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고 성인이 되면 어머니의 역할은 끝나는 것으로 해석됐으나, 자녀가 결혼한 후에도 어머니들은 손자녀 양육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직업과 가정생활 병행이 힘들고 보육제도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맞벌이 자녀를 도와야 하는 것이다. 고학력 어머니들은 자녀의 학습을 보충·지도하고 사교육 정보를 수집한다.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니는 자녀의 과제, 논문, 상급 학교의 원서 작성을 도와준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모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어머니들이 자녀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고 이러한 행위를 사랑으로 해석해 죄의식을 갖지 못하게 한다. 낮은 학점을 받은 대학생의 어머니가 교수를 찾아와서 따졌다는 이야기, 대학을 졸업한 자녀가 회사 면접을 볼 때 어머니들이 면접이 끝날 때까지 회사 앞에서 기다린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해외 유학을 다녀와서 엄마에게 “나 이제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 ‘헬리콥터맘’ 자녀들의 이야기와, 임용된 이후 자기 연구실을 꾸미는 것도 어머니가 와서 해줬다는 어떤 대학 교수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자녀는 늘 아이와 같으니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가 된다. 90세의 어머니도 70세의 자녀에게 “조심해서 다녀라”고 노심초사하기 마련이다. 또 구조적 실업이나 경기불황으로 청년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경우 부모가 자녀의 생존을 책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어머니가 자녀의 인생을 계획하고 관리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주변에서는 이러한 분리를 생각하지 않고 자녀들이 영원한 마마보이, 마마걸로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들을 발견하곤 한다. 이러한 행위가 과연 자녀에게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자녀들은 과잉보호와 가족이라는 안전망 속에서 위험에 노출되거나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지 못할 것이다. 철학자 사라 러딕(Sara Ruddick)은 「모성적 사유」에서 “어머니는 자녀가 독립적이고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돌봄이나 간섭을 억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어머니는 돌봄으로 형성되었던 애착관계 때문에 분리의 아픔을 감당해야 한다. 반면에 우리 사회에는 진정으로 돌봄이 필요하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치매 환자 아버지의 보호자가 된 청년 조기현은 「아빠의 아빠가 됐다」에서 어린 나이에 아픈 부모를 돌보는 영케어러들의 경험을 기술한다. 이들은 아픈 부모 돌봄을 위해 학업을 중단하거나 직장을 다니지 못한다. 이들은 다른 연령층의 돌봄 제공자들보다 더욱더 어려움에 처해 있다. 노년과 장애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가족의 돌봄에 의존하기에 그 가족은 힘든 상황에 있다. 과잉보호와 돌봄이 가족이라는 배타적 울타리에서 이뤄질 때 정작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소외된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의 수혜나 분배는 불균형적이다. 자녀와 분리된 삶으로 나아간다고 나쁜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녀가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지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지원하면 된다. 노년기 여성들은 자녀의 삶을 그들에게 맡기고 돌봄에서 자유로워져서 자신에게 몰두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하면 좋겠다. 누군가를 돌보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다면 가족을 넘어 공동체 차원에서 정말 돌봄이 필요한 곳,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 돌봄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돌봄이 여성에게만 한정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박주헌 기자 ogoya@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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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10-02 오전 9:52:13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