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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 2024-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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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은 희년이다. 정확히 말하면 25년마다 돌아오는 성년(聖年, holy year)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신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만큼 희년에 대한 준비나 홍보가 늦은 감이 있다. 이번 희년이 지나면 다시 25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면 조금은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을까. 이번 희년의 주제는 ‘희망의 순례자들’이다. 교회가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길었던 코로나 여파, 그리고 지구촌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쟁, 경제와 기후 위기 등 희망을 갈망하는 시대적 요청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희망은 무얼까? 사실 희망은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핵심이다. 베드로 서간은 당부한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2014년에 방한하셨을 때 한국 신자들에게 ‘기억의 지킴이’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주십사 당부하셨다. 과연 우리는 이 시대에 어떤 희망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유일한 희망은 하느님께만 둘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말씀도 막막하게 다가온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시기에 오늘 우리에게 희망이실 수 있는가? 필자는 가난에서 그 답을 찾고 싶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가난한 인간으로 오셨음에, 그로써 인간을 부유하게 해주셨음에 희망의 근거가 자리한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신학교에서 필자의 논문 지도를 받는 한 학생은 교회 세속화의 가장 큰 표지로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투신하지 못하는 현실을 들었다. 간단한 표현이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아무리 시노달리타스를 이야기하고, 권위주의와 성직주의를 비판하며 교회 변화와 쇄신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친화적인 교회, 가난한 이인 젊은이들에게 친화적인 교회가 되지 않으면 본질과 무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내용이 바로 가난한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이 말씀은 구호나 교리보다는 축복과 약속의 성격이 더 크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겠다는 투신의 표시인 것이다. 실제로 그분은 이른 새벽, 아버지와 기도 중에 만나는 시간을 빼고는 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운명을 당신 것으로 하셨다. 또한 제자들이 그렇게 살도록 이끌어주셨다. 필자의 네 번째 책이 막 출간되었다. 제목은 「미소한 그대가 희망」이다. 가장 작고 가난한, 미소한 그대가 희망인 이유는 하느님께서 미소한 그대를 선택하셨고, 그대와 하나 되시어 그대와 함께 이 세상을 밝히 빛내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약 하느님께서 부유하고 강한 사람들을 선택하셨다면 과연 희망일까? 가난한 자·작은 자·소외된 자·병 중에 있는 자·죽음 앞에 선 자. 그대들이 희망인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대들과 하나 되셨기에, 그리고 그대들의 모습으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노래할 수 있고, 고되고 힘든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이를 택하시어 모든 이에게 희망을 주신 주님, 교회가 미소한 당신을 본받아 미소한 이들의 교회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한민택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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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10-02 오전 7:32:00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