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조카네 집에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조카가 어머니를 모시고 싶은데 너무 연로하시니 이모가 좀 모시고 올 수 없겠느냐고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저도 필리핀은 가 보고 싶은 곳이어서 쾌히 승낙을 했지요.
조카네 집에서 5분 거리에는 공원이 있었는데, 한 쪽에 아름다운 성당이 있었습니다. 사철 더운 지방이라서인지 벽도, 문도 없이 그냥 활짝 공개된 성당이었고, 더욱 감사한 것은 24시간 열려 있는 성체 조배실이 있었습니다.
언니와 저는 매일 새벽미사에 참례하고, 틈만 나면 성체조배실에 들러 주님과 독대하는 행운을 누렸지요. 제가 누린 행운은 그뿐이 아닙니다. 조카의 초청을 받았을 때, 저는 미리 한 가지 부탁을 했었지요.
“마닐라 근교에 ‘롤롬보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은 열다섯 어린 나이에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민란 때문에 잠시 피신해서 공부했던 곳인데, 당시 도미니코 수도회가 있었던 곳이라더라. 그러니 꼭 찾아 두었다가 나를 안내해 다오.”
조카는 제 숙제를 성실히 이행했다가, 주말이 되자 두 시간 남짓 차를 몰아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했지요. 골목 입구에 붙어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성당 - 300m’라는 한글 표지판을 볼 때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아담한 성당이 나왔지요. 입구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님, 최양업 신부님의 동상을 보는 순간 저는 너무나 반가워 얼른 무릎을 꿇고 인사드렸습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낯설고 말설은 중국 땅으로 들어가 신학 공부하랴, 외국어(그것도 중국어, 불어, 라틴어 등) 공부하랴, 얼마나 고단했을까…. 게다가 금의환향의 귀국 길에 온갖 수난을 겪어야 했으니 그 고충이 오죽했을까. 그분들이 남긴 편지들이 마구 뒤섞여 떠올라 가슴이 아렸습니다.
반갑게도 한국 수녀님이 우리를 맞아 주었지요. 그곳에는 ‘안드레아 수도원’ 소속 수녀님 세 분이 상주하고 계시면서 방문객을 안내한다고 합니다. 20여 년 전 오기선 신부님께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이곳을 찾아내고, 한국교회의 노력으로 이 정도의 기념 성당을 세우게 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여러 가지 에피소드도 들려주십니다.
성당에 들러 조배를 드리고, 7층탑처럼 보이는 ‘칠궁방’으로 들어갔지요. 계단을 타고 올라 보니 층마다 기도방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대 데레사 수녀님의 7단계 기도를 염두에 두고 만든 방이라는데, 넓은 탁자 앞에 십자가가 모셔져있고 문은 한국 전통식 격자무늬 창살이어서 정다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 ‘유해소’에도 들어가 무릎 꿇고 묵상하자니, 옥중에서 교우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구절이 떠올라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교우들 보아라… 천주 오래지 않아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 가지로 영원히 천주대전에서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번 바란다. 잘 있거라.”
그러나 정작 저를 더 크게 울린 것은 성당 뜨락에서 본 망고나무였습니다.
필리핀에서 십오 년을 넘게 산 조카도 이렇게 큰 망고나무를 본 적이 없다고 할 만큼 우람한 망고나무, 그 앞에는 ‘망향의 망고나무’라는 팻말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성인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고향에 계신 부친(성인 이냐시오 김제준)께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읽으시면서 바로 이 망고나무 아래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성 도미니코 수도회 별장이었던 이곳의 1839년 경의 사진은 마닐라 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망고나무 등걸에 몸을 기대니 신부님의 체취가 느껴지면서 마구 눈물이 흘렀습니다.
아, 자랑스러운 신앙의 조상이시여, 천국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글 _ 안 영 (실비아, 소설가)
1940년 전남 광양시 진월면에서 출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장편소설 「만남, 그 신비」,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 소설집 「둘만의 이야기」 「치마폭에 꿈을」 수필집 「나의 기쁨, 나의 희망」 동화 「배꽃마을에서 온 송이」 등을 펴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가톨릭문인회 회원이다. 한국문학상, 펜문학상, 월간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중앙대문학상, 제1회 자랑스러운 광양인상을 수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