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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 전파의 거점 백령도로 순교 신심 순례 떠나볼까요 2024-09-04

2019년 인천교구 순교 신심 순례지로 선포된 백령도성당


선교사 17명 백령도 앞바다 통해 입국
바닷길 개척한 인물이 성 김대건 신부

모펫 신부, 1959년 백령도본당 설립
열정적 사목활동으로 신자 수 급증
1960년 최신 장비 갖춘 병원도 세워
남아있는 공소 10곳 모두 개성 있어

인천교구, 순교 신심 순례지로 선포
백령도·대청도 순례 상품 나와


선교사들의 입국 거점 백령도
‘흰 깃털 섬’. 백조라고도 부르는 겨울 철새 고니가 섬을 뒤덮을 정도로 많이 서식해 붙은 이름이란다. 그래서 일찍이 삼국 시대에는 ‘곡도(鵠島, 고니섬)’라고 했다. 북방한계선(NLL) 바로 아래 서해 최북단 백령도(白翎島) 이야기다.

서울보다 평양이 더 가까운 섬 백령도. 지금은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속하지만, 남북 분단 전에는 황해도 땅이었다. 북한 장산곶과 불과 14㎞ 거리. 해변에 1500개나 되는 ‘용의 이빨(적 상륙을 막기 위한 뾰족한 구조물)’이 설치된 이유다. 서쪽 해안에는 ‘천안함 46용사 위령탑’이 서 있다.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앞바다에서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폭침돼 승조원 46명이 전사한 것을 기리는 탑이다.

 웅장한 바위가 늘어선 두무진처럼 명승으로 지정될 만큼 뛰어난 비경을 자랑한다. 사곶해변과 콩돌해안도 볼거리다. 운이 좋으면 망원경으로 바위에서 일광욕하는 천연기념물 점박이물범도 관찰할 수 있다.

백령도는 한국 가톨릭교회와도 인연이 깊다.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파하려 중국에서 입국한 선교사들 발자취가 서려 있다. 400년간 이어진 해금령을 딛고 그 바닷길을 개척한 인물은 바로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였다.

이에 인천교구는 2019년 10월 특별 전교의 달을 앞두고 백령도성당을 ‘순교 신심 순례지’로 선포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올해 인천교구 신자 대상으로 백령도와 대청도를 도는 순례 상품이 출시됐다. 지난 12월 인천교구가 섬 순례 활성화를 위해 인천관광공사·가톨릭환경연대와 맺은 업무협약의 결실이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가톨릭환경연대와 함께 8월 27~28일 백령도를 순례했다.
 

백령도성당에 있는 김대건 신부상.

 

백령도성당에 안치된 김대건 신부의 성해(치아)

 


김대건 신부, 백령도에서 바닷길을 개척하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고속 여객선을 타고 소청도·대청도를 거쳐 백령도까지 가는 데 4시간이 걸렸다. 함께 하선하는 해병대원을 마주하자 최전방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백령도는 과거에도 군사 요충지였다. 해적들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중국 어선도 조기를 잡으러 앞바다로 몰려들었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한양 마포에서 배를 타고 백령도로 향한 이유도 여기 있다.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지시로 그는 중국에서 출발한 선교사들이 백령도 앞바다에서 조선 배로 갈아타 입국하는 경로를 구상했다. 기해박해(1839)로 만주 책문(변문)과 의주 관문을 지나 조선에 입국하는 길이 막힌 탓이다.

마침내 백령도 앞바다에서 중국 어부를 만나 동료 선교사에게 쓴 편지와 조선 지도 등을 전달한 김 신부. 그러나 그는 곧 백령도 인근 순위도에서 관원들에게 체포됐고, 9월 16일 한양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김 신부의 희생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 많은 선교사가 백령도 앞바다를 지나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령도본당 마당에 김대건 신부 성상과 함께 백령도를 거친 선교사 17명 이름·입국연도를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이 중 6명이 김 신부와 함께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초대 주임 부영발 신부(1922~1986)의 사진이 백령도성당에 걸려 있다.


 

종탑을 간직한 백령도본당 사곶공소. 

 

백령청소년문화의집 앞에서 바라본 황해도 장산곶. 백령도와 불과 14km 떨어져 있어 맨눈으로도 보인다. 


 

백령도본당 두무진공소. 백령도에 남아있는 공소 10곳 중 한 곳이다.

 

백령도본당 사곶공소 내부.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꾸준한 관리로 잘 보존되고 있다.


선교사의 피와 땀으로 세운 백령도성당
백령도본당은 1959년 5월 9일 설립돼 올해 65주년을 맞았다. 초대 주임은 메리놀외방전교회 모펫(E. Moffet, 1922~1986, 훗날 환속) 신부. 앞서 중국에서 선교할 때부터 쓴 ‘부영발(傅永發)’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문명과 등진 곳에서 사목하고 싶다’며 백령도행을 자원했다.

원래 백령도는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 풍족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터지고 1·4후퇴로 이북 피란민이 몰리며 포화 상태가 됐다. 부 신부는 1973년 섬을 떠날 때까지 14년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백령도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목했다. 인프라를 세우고, 국제 원조도 이끌어내 주민들에게 식량과 어선을 선물했다. 그 결과 부임할 때 300명에 그쳤던 신자 수는 금세 섬 인구 절반인 5000명으로 늘어났다. 한때는 주민의 80%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백령도 주민들은 이방인인 부 신부에게 냉랭했다. 그러다 그가 익사 직전인 조개잡이 소년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백령도성당을 짓는 과정의 눈물겨운 사연도 전해진다. 부 신부는 중국 선교 시절 공산당에 체포돼 고초를 치렀는데, 그때 얻은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평생 시달렸다. 그때 ‘신부의 병이 나으려면 온몸의 피를 갈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신자들은 없는 살림에도 치료비를 모았다. 하지만 부 신부는 “나를 위해 이 돈을 쓸 수 없다”며 모두 건축비로 사용했다. 그가 직접 감독까지 한 끝에 1961년 12월 마침내 백령도 첫 성당이 완공됐다.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지은 성전인 셈이다.



백령도 첫 병원, 청소년 문화공간 되다
1960년 백령도에 첫 병원을 설립한 주인공 역시 부 신부다.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딴 ‘복자 김안드레아병원’이다. 낙도 중 낙도에 들어선 의료기관이었지만, 미국에서 들여온 최신 의료장비를 갖춰 남부럽지 않았다. 부 신부는 1963년 결핵 병동을 추가로 세우기도 했다. 도민 100명 중 16명꼴로 결핵 환자였기 때문이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3년 동안 미국에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 2만 통을 보냈다.

김안드레아병원은 부 신부가 백령도를 떠나고 여러 소유주를 거친 끝에 인천광역시의료원 분원인 ‘백령병원’이 됐다. 그리고 2014년 본래 위치에서 500m 떨어진 곳으로 이전했다. 지금도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도의 유일한 병원으로서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옛 병원 건물은 개조를 거쳐 2022년 백령도 최초로 청소년 문화공간이 됐다. ‘백령청소년문화의집’이다. 백령도성당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주치는 2층짜리 건물이다. 독서카페와 방송실·밴드연습실 등을 갖춰 변변한 즐길 거리가 없던 백령도 청소년들에겐 그야말로 ‘오아시스’다. 푸른 눈 선교사의 백령도 사랑은 이렇게 또 다른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백령도본당 성가단장 이주언(베드로, 64)씨가 기억하는 부 신부는 ‘인자한 목자’였다. 모태 신앙인 이씨는 10대 때 복사를 서며 부 신부를 가까이서 봤다. 그는 “부 신부는 의료와 교육에 많이 투자해 교세를 크게 확장했다”며 “신자가 7000~8000명이라 미사 때 공소들마저 꽉 찼다”고 증언했다. 이씨의 삶은 백령도 현대사와도 맞물려 있다. 각각 황해도와 함경도에서 피란 온 부모가 섬에서 만나 결혼해 그를 낳았다. 91세인 어머니는 지금도 열심한 신자로, 공공근로로 버는 돈을 모두 봉헌한다고 한다. 이씨는 “두 차례 교적 정리 끝에 본당 신자는 500여 명으로 줄었지만, 그래도 절반 가까이 매주 미사에 참여한다”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이 신앙생활을 하는 어르신들이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공소의 섬 백령도
백령도는 인구 5000명·면적 50㎢로, 섬치고는 공소가 많은 편이다. 부 신부의 열정적 사목에 힘입어 1960년 여럿 생겨났다. 현재 남아있는 공소는 모두 10곳(가을리·관창동·두무진· 사곶·소가을리·신화동·연화리·용기포·장촌·화동)이다. 저마다 생김새가 달라 개성 있다.

사곶공소는 외벽이 고니처럼 새하얀 데다 종탑을 간직해 아름답다. 내부는 잘 정돈돼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매일 꾸준히 회합하며 열심히 관리하는 덕분이다. 평범한 붉은 벽돌 주택처럼 생긴 외관에 십자가와 성모상이 설치된 두무진공소도 이채롭다.

모든 것이 갖춰진 성당에서 편히 신앙생활 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나. 공소를 찾아 신자들의 오랜 손때가 묻은 성물을 보며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이번 순례에 동행한 가톨릭환경연대 회원 이장수(토마스)씨는 “멋진 풍경뿐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공소에서 함께 기도할 수 있어 더욱 뜻깊다”고 말했다.

인천교구 환경사목위원회 위원 원재연(하상 바오로,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연구교수는 “공소에서 함께 주모경과 순교자를 위한 기도 등을 바칠 수 있어 기뻤다”며 “백령도 교회 자산 중 가장 가치가 큰 것이 공소”라고 평가했다. 이어 “교구 지원과 신자들의 자발적 봉사로 공소들을 잘 관리하면 ‘템플 스테이’ 못지않은 ‘공소 살기 체험’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이를 통해 한국 교회 역사성과 공동체 영성도 되살리고, 백령도 순례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인천을 넘어 전 세계 신자가 찾기를
1박 2일간 순례를 이끈 최진형(미카엘) 가톨릭환경연대 선임대표는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로 방한하는 교황과 세계 젊은이들이 백령도를 찾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그는 “순교 신심과 분단의 공간인 백령도에서 선교사들의 개척정신을 되새기고, 남북통일과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면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구와 인천관광공사와 협력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태현 인천관광공사 관광산업실장도 “인천교구 신자들에게 백령도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저렴한 가격으로 순례를 기획한 것”이라며 “이용 대상을 인천을 넘어 수도권 신자로 늘릴 수도 있다”고 전했다. 인천관광공사가 출시한 순례 일정은 백령도만 순례하는 1박 2일·대청도도 함께 방문하는 2박 3일 코스로 나뉜다. 예약 문의 : 010-8889-7001, ㈜백령문화투어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24-09-04 오후 4:52:00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