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뉴스
- 전체 2건
죽음으로 신앙 증거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복자로 탄생 | 2024-09-04 |
---|---|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82위 시복 청원 교구가 분리되고 교세가 성장하면서 한국인 성직자의 비중도 계속 높아졌다. 1910년 당시 한국인 성직자는 15명이었는데, 1936년에는 100명을 넘어서게 됐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4년 한국인 사제는 132명으로, 당시 국내에 거주하던 외국인 선교사(102명)보다 더 많아졌다. 물론 당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인 선교사들이 대거 추방된 이유도 있었지만, 그 후로 한국인 사제는 줄곧 외국인 선교사 수보다 많았다. 일제 강점기 때 교회 신심의 중점은 무엇보다 ‘순교자 공경’이었다. 박해 시기가 천주의 창조 신앙과 성모신심·예수성심 등을 바탕으로 순교의 신앙을 살았다면, 종교 자유를 얻은 후 우리 신자들은 그 순교를 살았던 순교자에 대한 관심과 공경·현양에 주력했고, 마침내 1925년 79위 시복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시복·시성은 교회의 절차법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구 수속과 교황청 수속이라는 긴 과정을 거쳐서 진행되었다. 79위의 순교복자가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 순교자로만 이루어진 이유는 초기 조사가 1839년 앵베르 주교의 순교자 기록을 바탕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계속된 기해박해 순교자 73위 기록과 1846년 페레올 주교가 김대건 신부를 잃고 추가로 남긴 병오박해 순교자 9위의 기록을 합해서 교황청에 올린 데서 비롯됐다. 82위 순교자 기록은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의 라틴어 번역을 중심으로 「순교자 행록(Acta Martyrum)」으로 정리, 1847년 교황청 예부성성에 보내졌다. 10년 후인 1857년 82위 순교자에 대한 ‘시복건의 개시’가 선언되면서 가경자로 교황청 수속이 진행됐다. 1882년부터 시작된 시복재판을 통해 많은 증언록이 수집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재판기록을 정리해 번역, 1906년경 교황청에 제출됐다. 이러한 시복자료는 예부성성에서 세 단계 회의를 거쳐 다시 검증이 이뤄졌다. 옥사한 17위 중 열병으로 죽은 3위는 제외 마지막 본회의가 열리기 전 한국에서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미공개됐던 규장각의 조선왕조 기록이 공개됐다.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관련 기사들을 발췌, 자료를 수집했다. 조선 정부 측의 심문 기록과 사형판결문 등이 추가로 발굴됐다. 이러한 관변 측 기록을 보니 82위 시복 청원자 중에 옥사(獄死)한 17위가 고문으로 죽었는지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없었다. 따라서 당시 총신앙촉구관이었던 마리아니는 17위에 대해 모든 증언과 문서를 대조해 일일이 분석하여 제시했다. 그리하여 3위를 제외한 14위가 순교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제외된 3위는 열병으로 죽은 것으로 판정됐다. 박해로 인해 죽은 것은 분명하나 순교 사실을 법적으로 증명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여겨 시복 대상에서 누락된 것이다. 그리하여 82위 가경자 중에 79위가 순교자로 판명됐다. 이어서 순교자들에 주어지는 기적 관면을 청원하여 윤허를 받았다. 마침내 1925년 7월 5일 79위 시복식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비오 11세 교황의 집전으로 거행됐다. 시복식에는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한국인 한기근 신부가 참석했다. 아울러 당시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연합회는 시복식에 참석할 한국 평신도 대표자로 미국 맨해튼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장면(張勉, 요한, 1899~1966)을 선출했다. 장면은 당시 미국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동생 장발(루도비코)과 함께 로마로 갔다. 예수성심신학교 교장이었던 기낭 신부도 마침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가 로마에서 합류했다. 79위 복자를 선포하는 교황의 칙서가 낭독되면서 다섯 개의 대형 상본이 공개되었다. 이를 ‘영광의 발현’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그토록 긴 교회의 수난 기간을 거치며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 가운데 79위가 최초로 복자로 탄생했다. 1890년 8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뮈텔 주교의 사목 표어 ‘순교자들의 꽃을 피워라(Florete flores martyrum)’라는 말이 실제로 이뤄졌던 순간이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시복식에 가지 못하기도 당시 한국인 사제로 가장 나이가 많고 선배였던 정규하 신부는 풍수원성당에 있으면서 이 시복식에 참석하기를 원해 1925년 연초부터 드브레드 보좌 주교님께 편지를 썼다. “너무 송구스럽고 외람돼 우리 순교복자 로마 시복식에 참석할 원의를 표시하거나 그 허락을 간청하려 하지 않았으나, 요즘 날이 갈수록 로마에 가고 싶은 원의가 간절해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체면 불구하고, 하실 수 있다면 주교님께서 제가 로마에 가는 것과 경비까지도 허락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조만간 곧 이자까지 계산하여 모두 갚아드리겠습니다. ?교구의 규정이 그럴 수 없어 힘드시더라도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주교님 뜻대로 되옵소서! 불초자, 정 아우구스티노 올림, 1925년 1월 16일.” 불행하게도 거절의 답장이 왔다. “경애하올 신부님, 신부님께서 하신 부탁을 제가 수락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제가 변통할 수 있는 자금이 없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특히 교구가 너무 궁핍하고, 또 성지순례에 힘쓰기보다는 도와주어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재정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그해 여름에는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교회 안팎으로 어려움을 더했다. 그럼에도 1925년 79위 순교복자 탄생으로, 한국 교회는 전국적으로 79위 복자에 대한 전구 기도와 함께 해마다 9월 26일 복자 첨례일을 기념하게 됐다. 또 시복식이 있던 그해 7월 20일 서울·대구·원산대목구장 명의로 ‘새로 나신 복자를 향하여 하는 기도문’을 반포했다. “치명하신 복자들이시여, 너희는 성총의 힘을 입으사 신덕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성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비나니 우리를 생각하소서. 과연 우리 등은 아직도 이 전장의 나그네로 있사오며 너희 승천의 영광을 모든 선의 근원이신 천주께 진심으로 돌려보내나이다. 오홉다 복자시여, 천주 대전에 엎드려 너희 비는 소리를 너희 모후이신 성 마리아의 소리에 합하여 천주의 자비하심을 구하소서?.”(「경향잡지」 1925년 7월호 313~314쪽)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
|
[가톨릭평화신문 2024-09-04 오전 9:52:04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