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싱(Earthing : 접지, 맨발 걷기)에 취미가 붙기 시작한 것은 고요함을 발견하고부터다. 내 호흡대로 얼마든지 천천히 걸을 수 있고,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을 막연히 바라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그 고요한 사색이 좋았다. 하지만 늘 비슷한 시간대에 어싱을 하다 보니 낯익은 얼굴이 많아지면서 나의 고요함도 깨지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비쩍 마르고 머리카락은 다 빠져 두건을 둘러쓴 젊은 여성이 매일 같이 공원에 나와 어싱을 하고 있으니, 그 사연이 다들 궁금했나 보다.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일부러 땅만 보고 걷는데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내게 말을 걸어왔다.
1~2년 차 암환자였더라면 아주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내 이야기를 했을 텐데, 지금의 난 너무 지쳐버린 7년차 암환자였다. 기나긴 투병 이야기를 다 나눌 수 없는 노릇이니 대충 “암 투병 중이다, 희귀암이라 맞는 약이 없고, 온몸 여기저기 많이 퍼졌다”라고 간략히 얘기하고 나면 사람들은 딱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아는 암 지식을 잔뜩 나열하거나, 여러 조언을 하며 나를 돕고자 했다.
안타깝게도 7년차 베테랑 암환자인 나에게 신선한 정보는 없었다. 그래도 친분이 전혀 없는 내게 다가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하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그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잘 들어주고, 웃어 보이려 애썼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이 그들의 선심을 더 적극적으로 자극한 것일까? 어느 날부터 배려라고 하기엔 다소 지나친 참견이 나를 힘들게 하기 시작했다.
그날그날 나의 컨디션이 어떤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많이 걸어야 한다고 쉬고 있는 내게 걷기를 강요하거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며칠 쉬고 온 날이면 의지를 더 강하게 가져야 한다며 “다음에도 안 나오면 집으로 찾아가겠다, 끌고라도 내려오겠다”라며 강압적으로 느껴지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걱정하고 위하는 좋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 품기엔 내가 너무 지쳐있었다.
몸이 점점 아파질수록 타인의 작은 언행에도 내 마음속에 날이 삐죽삐죽 섰다. 너그럽지 못한 인간 황수정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고, 그런 나를 마주하는 것이 몸이 아픈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웠다. 왜냐면, 난 내가 아량이 넓은 사람인 줄 알았거든! 아! 예수님, 이게 나의 실체였던 것이죠? 난 왜 이렇게 못났을까요!
그렇게 한참을 자괴하고 있는데 문득, 나의 불완전함을 고백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으로 용기를 내, 내 마음을 간곡히 전하고 싶다. 당신이 내게 뭘 해주려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냥 조용히, 아무 말 없이, 내가 걷는 길에 지나가는 ‘행인1’만 되어주어도, 그 자체로 나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고 있다고. 그거면 충분하고, 그것이 지금 내게 가장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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