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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형의 클래식 순례] 라흐마니노프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찬 예배> 2024-09-03

예전 중동에서 오신 신부님 한 분과 알고 지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동방 교회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는데, 그분은 자신이 동방 가톨릭교회인 마론 교회의 사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동방 교회 중에도 교황청과 일치를 이루는 ‘가톨릭교회’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동방 교회에 관해서도 관심이 생겼습니다.


가톨릭교회의 미사에 해당하는 정교회의 성찬 예배는 몇 가지 종류가 있고 교파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찬 예배가 가장 널리 거행됩니다. 엄격한 도상을 따라야 하는 이콘이 그렇듯이 성찬 예배에 쓰는 음악 역시 대단히 엄격해서, 오랫동안 엄격한 단성가를 고수했고 종소리를 제외한 어떤 악기도 금지했습니다. 


러시아 역시 12세기부터 즈나메니 성가라 불리는 화려한 단성가 전통이 꽃을 피웠지만 다성 음악 기법은 천천히,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또 교회 바깥에서 활동하는 세속 음악가들에게는 굳게 닫힌 영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차이콥스키가 1878년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찬 예배>를 발표했을 때, 교회 당국에서는 처음에 성찬 예배에서 쓰지 못하게 했고, 출판을 방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창작의 자유를 주장한 차이콥스키와 출판업자가 결국 소송에서 승리하면서 황실 경당의 오랜 독점권이 철폐됐고, 19세기 후반부터 여러 작곡가가 자유롭게 러시아 교회 음악을 쓰기 시작하면서 눈부신 발전이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도 있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콥스키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1910년에 자신도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찬 예배>를 썼는데, 평소에 잘 몰랐던 전례 음악에 관해 깊이 연구하며 작곡을 진행했습니다.


다만 이번에도 전례에서의 사용이 금지되는 바람에 ‘콘서트 작품’으로만 연주할 수 있었고, 러시아 혁명 후에는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마저도 불가능해졌습니다. 게다가 서방에서도 작곡가가 1915년에 쓴 또 다른 작품 <철야 기도>(All-Night Virgil)의 인기에 가려 별로 연주되지 않았지요. 하지만 작품에 담긴 엄숙한 아름다움은 최근 들어 조금씩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정교회 전례가 대체로 길고, 미사로 비유한다면 통상문과 고유문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구성이 꽤 복잡합니다. <철야 기도>와는 달리 전통적인 찬가를 쓰지 않아서 그런지 작곡가의 개성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는 느낌인데, 가령 성찬 찬가에서는 라흐마니노프 음악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종소리를 모방한 음향이 등장해서 슬쩍 미소를 짓게 됩니다. 


특히 미사의 대영광송에 해당하는 ‘삼성송''(Trisagion)이나 ‘케루빔 찬가’, 그리고 복합창을 구사한 ‘주님의 기도’는 러시아 교회음악 특유의 어둡고 깊은 베이스 파트가 빛나는 장엄한 무반주 합창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곡입니다.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
[가톨릭신문 2024-09-03 오후 5:32:09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