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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아버지 모습으로 하느님 사랑 남기고 떠나다 | 2024-0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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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기 가까운 인생을 하느님께 봉헌한 전 마산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가 8월 28일 하느님 품으로 떠났다. 박 주교의 하느님 사랑은 대단하다. 사제가 된 역사를 보면 우여곡절이 참 많았는데도 결국엔 주님의 목자가 됐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늘 웃으며 대했다는 고인을 추모하며 박 주교가 살아온 97년의 삶과 신앙을 돌아봤다. ■ 박정일 주교 선종 이모저모 ◎… 박정일 주교의 선종 소식이 알려지고 마산교구청에 마련된 빈소에는 추모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산교구 75개 모든 본당 신자들은 매시간 순서대로 빈소를 찾아 위령기도와 미사를 봉헌했다.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2900여 명이 빈소를 방문했으며 27대의 위령미사가 봉헌됐다. 빈소를 가득 메운 추모객들은 큰 어른으로서 교회를 위해 한평생 헌신해 온 박 주교가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길 바라며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또한 각 교구 주교들도 빈소에 속속 도착해 조문에 함께했다. 31일 봉헌된 장례미사에는 25명의 주교단과 140여 명의 사제, 60여 명의 수도자와 1450여 명의 신자들이 참례했다. ◎… 박 주교가 마산교구장으로 재임할 당시부터 지금까지 늘 가까이에서 함께했던 조카 박성임(클라라) 씨는 박 주교를 향한 각별한 마음을 전했다. 시인이기도 한 박 씨는 “주교님은 저에게 영적 멘토가 되어주셨던 분”이라며 “좋은 탈렌트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공동의 선익을 위해서 잘 쓰라고 격려해 주셨다”고 말했다. 박 씨는 “장례미사 당일 새벽에 잠이 깨서 주교님을 위한 조문을 써보다가 몇 번이나 울컥하며 눈물을 흘렸다”면서 “늘 똑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한결같이 대해주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 박 주교의 외조카인 김진영(브루노·서울대교구 용마산본당) 씨는 “부모를 잘 공경하는 것이 주님을 공경하는 것과도 같은 거라며 항상 효를 많이 강조하셨던 것이 생각난다”면서 “늘 신앙생활에 충실하라고 당부하셨던 주교님 말씀대로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 경남 고성 이화공원묘원 성직자 묘역. 박 주교가 안장된 위치는 제2대 마산교구장인 고(故) 장병화(요셉) 주교 바로 옆자리. 박 주교는 그렇게 전임 교구장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장지까지 동행했던 신자들은 “두 분 주교님이 다시 만나게 됐으니 좋아하시겠다”며 “두 분이 함께하시니 적적하진 않으시겠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 박정일 주교 발자취
◎…하느님께 충성을 박 주교는 192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전주교구 천호성지를 연상케 하는 산골 마을이라고 회상하던 곳이다. 부모님은 신자가 아니었고 산골 마을이라 공소도 없었지만, 삼촌을 따라 성당에 다니며 세례를 받았다. 중학생 시절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1945년 4월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속으로 늘 사제를 꿈꾸며 본격적으로 신학교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져 시름시름 앓자, 어머니가 마침내 박 주교의 손을 들어줬다. 1948년 9월 바라던 덕원신학교에 입학한 기쁨도 잠시, 1년을 채 넘기지 못한 이듬해 5월 북한 공산 정권이 신학교를 폐쇄했다. 심지어 당시 평양교구장이던 홍용호(프란치스코) 주교는 납치돼 행방불명 상태였다.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사제의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신학교를 가기 위해 월남 계획을 짰다. 1950년 2월 27일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해주로 갔다. 그의 간절한 마음과 달리 첫 시도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후 두 달간의 옥살이가 시작됐다. 온갖 협박과 구타, 굶주림을 견뎌야 했다. 따뜻한 봄날 풀려난 박 주교. 봄기운을 만끽하기도 전 한 달여 만에 6·25전쟁이 터졌다. 이후 북한군에 강제 징집됐지만, 용케 도망쳐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 안 제오르지오(George Carroll) 몬시뇰이 써준 ‘신자 확인서’를 품에 안고 월남에 성공했다. 대구, 제주, 부산 등으로 피난을 다니며 임시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박 주교는 1952년 8월 14일 로마 유학길에 오른다. 피난살이 중인 가족이 걱정되긴 했지만 교회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로 떠났다. 박 주교는 1958년 11월 23일 로마에서 평양교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2년간 사회학 공부를 하며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박사학위 준비 도중 귀국하라는 명을 받고 1962년 귀국해 부산교구 초량본당에서 첫 사목을 시작했다. ◎…순명이 체질 “어떤 면으로 보면 ‘행운아’ 같아요.” 생전 스스로를 행운아라 표현하며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고 말했던 고(故) 박정일 주교. 변화 많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 속에서 늘 하느님께 감사하며 주어진 삶에 순명해 왔다. 박 주교는 한국교회에서 3개 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된 유일한 주교다. 제주·전주·마산교구에서 교구장을 지낸 그는 첫 주교 임명 소식을 들었을 때 “청천벽력 같았다”고 했다. 두려움과 망설임이 더 컸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무모하다 싶을 만큼 어려운 일이 맡겨질 때에도 거절하지 않았다. 1977년 4월 제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박 주교. 그는 같은 해 5월 31일 주교품을 받고 제주교구를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이 두터운 교회’, ‘사회 속에 현존하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5년간 제주교구장으로 사목하던 중 1982년 6월 24일 전주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1987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을 준비하며 많은 일을 했다. 박 주교는 그 가운데 가장 뜻깊었던 일로 두 가지를 꼽았다. 박 주교는 훗날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남미 페루에 교구 파견 선교사를 보낸 일과 고향을 닮은 천호성지를 조성한 일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마산교구장에는 1988년 12월 15일 임명됐다. 마산교구에서는 ‘사회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친교와 봉사, 증거의 삶을 사는 소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또 신설 본당도 많아졌다. 박 주교는 당시 관리국장이던 최용진 신부(이냐시오·원로사목)와 1년에 본당 하나씩 만들자는 계획을 세우며 이를 실천해 나가기도 했다. 아울러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주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과거사 반성’을 통해 교회 쇄신과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기도 했다. 특히 2001년부터 11년간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은 박 주교는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추진한 124위 시복시성에 큰 공헌을 했다. ◎…온유한 아버지 박 주교의 사목 표어는 ‘충성과 온유’(집회 45,4)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늘 웃으며 대했다는 박 주교는 본인의 모토대로 삶을 살아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 주교가 ‘제2의 고향’으로 여겼던 마산교구 사제들은 그가 ‘온유한 아버지’였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사제들에게는 잘못해도 야단치기보다는 타이르며 온화한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허성학 신부(아브라함·원로사목)는 “어떤 사람이든 욕하는 법이 없고 꾸짖을 때에도 늘 부드럽게 말씀하셨다”며 “화낼 줄 모르시고 따뜻한 아버지처럼 대해주셨다”고 말했다. 최근 10년 전부터 박 주교를 모시며 임종까지 지킨 최용진 신부는 이웃에 살며 자주 만나 술도 한잔씩 했다고 회상했다. 최 신부는 “하느님께 충성하던 주교님의 믿음이 참 보기 좋았다”며 가장 기억에 남는 주교님의 유머를 소개했다. “주교님께서 술자리에서 이런 농담을 자주 하셨어요. 통일이 되면 평양교구에 가서 주교하고 싶다고요.” 박 주교는 2002년 11월 11일 마산교구장에서 은퇴하며 사목 일선에서 물러났다. 누구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컸던 박 주교는 부모님의 반대, 신학교 폐쇄, 강제 징집 등 다양한 여러움을 이겨내고 사제가 됐다. 이제는 그 사랑을 남기고 영원히 하느님의 곁으로 떠난 박 주교. 그는 2003년 본지에 기고한 13편의 글을 마무리하며 사제서품 성구가 유난히 생각난다고 썼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 88,2) 정정호 기자 pius@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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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9-03 오후 1:52:05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