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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용서해주시는 하느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다 2024-08-28

“선생님한테가서 학생회장 사퇴하겠다고 해. 네가 얘기할 때까지 학생회 애들은 매일 집합하게 될거야. 너 때문에 다들 이렇게 혼나는 거 좋아?”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회장이 되면서부터 고3 학생회 선배들의 호령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매일 점심도 못 먹고 불려 오는 학생회 친구들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렇다고 선생님을 찾아가 학생회장을 그만둔다고 말하는 것은 책임감 없는 행동 같아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단지 연기자이기 때문에 학생회장을 그만두라는 선배들의 얘기가 납득되지 않았지만 당차게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무섭고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선배들한테 더 괴롭힘을 당할까봐 혼자 꾹꾹 참으며 한동안 버텨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7년 후, 방송국 입구를 지나며 경호원분께 인사드리려고 보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나보다 먼저 학생회장을 했던 선배 언니였다. 경호업체에 입사해서 얼마 전부터 방송국으로 출근한다는 선배 언니는 나와는 다르게 마냥 반가워했다.


이 선배 언니는 학생회장 시절에 다른 선배들보다 유독 접촉이 많았다. 조회시간에 학생회장이 구령을 외쳤었는데 이 선배 언니는 구령 연습을 해야 한다며 한겨울에 1시간씩 나를 운동장에 세워놓곤 했다. 3개월 내내 새벽 7시에 혼자 학교 운동장에 나가 소리를 질러댔다.


“전체 차렷, 교장선생님께 경례!”


혼자 덩그러니 서서 구령을 외치다 보면 등교하던 학생들이 “어머, 연예인 이인혜다. 쟤 저기서 뭐하는 거야?” 낄낄 웃고 수군대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려왔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연습하다 보면 선배 언니가 뒤늦게 등교하는 모습이 보일 때도 있고 창문에서 내다보는 모습을 목격할 때도 있었다. 어찌나 원망스럽고 밉던지….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얼굴을 마주하니 여전히 얄미운 감정이 들었다. 아니, 반항 한번 못했던 그때의 울분이 더 강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그 순간이 종종 떠오를 때가 있었다. 선배들한테 말 한마디 못하고 당했던 바보 같은 내 모습이 후회가 되어 격한 마음이 울컥 올라오곤 했었다.


며칠 후 선배 학생회장 언니를 다시 만나 차 한잔을 하며 선배들의 괴롭힘에 힘들었던 지난 얘기들을 늘어놨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미안함을 느끼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놀랍게도 그 선배 언니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상처는 나만 기억하고 있단 사실에 더 억울한 마음이 들어 그날 성당에 가서 열심히 하느님께 선배 언니를 욕하며 고자질 기도를 해댔다. 위로가 돌아올 것이란 기대를 했건만 나에게 들려온 말씀은 주님의 기도 중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였다.


‘나도 남에게 상처 주고 알아채지 못한 일들이 많았을 텐데, 과연 그들은 날 용서했을까?’


순간 다시 돌아가고 싶은 정도로 후회스러운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해해 주겠지란 생각으로 가족들에게 짜증 내고 화냈던 일까지 전부 기억나기 시작했다. 4개월간의 일도 7년 후까지 용서 못하고 있으면서 내 죄는 용서해달라고 너무 쉽게 기도드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남에게 준 아픔은 생각하지 못한 채 내 아픔만 가장 크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매주 주님의 기도를 외치면서 문구 하나하나에 진심을 다하지 못했다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용서란 참 힘든 일인데 너무도 당연하게 늘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 또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다짐한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늘 반성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경성대 AI미디어학과 교수)

[가톨릭신문 2024-08-28 오후 2:32:16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