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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로 갈라진 큰 바위 사이로 생명의 물이 흐른다 2024-08-28

(작품 1) 예수님의 세례: 템페라 (14세기, 오흐리드, 클레멘스 교회의 이콘 미술관 작품의 모작), 63 x 50cm, 이콘 마오로 미술관, 안성, 한국


가운데 옷 벗은 예수님
요르단강 안에 서 계시고

요한 세례자의 손
예수님 머리에 얹혀 있고
눈은 성령 바라보고 있어



1. 기원(起源)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초대 교회에서는 두 가지 의미로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는 빛이 드러나심(Epiphaneia)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이 드러나심(Theophaneia)입니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349-407)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탄생 때보다는 세례를 통해서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9-11)

이콘에서 제일 위쪽에 어두운 반원형의 성부와 빛나는 검은 원형의 성령과 중심에 세례를 받고 계신 성자로서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를 드러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통해 많은 사람 앞에서 공적의 인정을 받으시며 그분의 인성과 신성이 드러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것을 공생활의 출발점으로 삼아 빛의 축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작품 1)



2. 민족들의 빛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면서 하느님께서는 이미 선택하신 분을 빛으로 세워 말씀하십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5-16; 이사 8,23─9,1)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이사 42,6)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나는 눈먼 이들을 그들이 모르는 길에서 이끌고 그들이 모르는 행로에서 걷게 하며 그들 앞의 어둠을 빛으로, 험한 곳을 평지로 만들리라. 이것들이 내가 할 일. 나는 그 일들을 포기하지 않으리라”(이사 42,16)라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신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고 요한복음은 그분이 빛이심을 처음부터 전합니다.(요한 1,5; 1,9)

이스라엘 백성이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탈출 13,21 참조) 인도받아 바다를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새로 태어난, 새 삶의 과정으로 세례를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세례는 하느님의 빛 안으로 들어가는 새 삶이라고 말합니다. 세례받는 사람들은 새 삶에 대한 기쁨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에 빛납니다. 이는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라는 구절과도 연관됩니다.

세례 이콘이 강조하는 것은, 그분은 말씀이지만 인간으로 낮추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는 회개와 함께 죄 사함의 과정이지만, 그분은 본인 스스로 죄와는 무관하실지라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를 씻으려는 의지와 행동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시겠다는 의지가 들어있습니다. 다만 빛의 축일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정신과 영성을 이끄는 신학적 의미가 더 크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품 2) 예수님의 세례: 템페라 24 x 19,5cm, 1500년경, 노브고로드 박물관, 노브고로드, 러시아

3. 구성(構成)과 상황

세례 이콘은 수백 년 지나는 동안 성경을 바탕으로 전례에 따라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더 강조하거나 추가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가장 전형적 형태는 커다란 바위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골짜기 사이로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려 오는 것입니다. 그 외에 여러 인물·강·나무 등이 등장합니다.

가운데에 옷을 벗은 예수님이 요르단강 안에 서 계시고 요한 세례자의 손이 머리에 얹혀 있는 형태의 이콘은 여러 의미를 복합적으로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 세례자가 성령을 바라보고 있는 구성입니다.(요한 1,34 참조) 당시에 요한 세례자에게 세례받으러 오는 많은 사람 앞에 성령께서 오심은 예수님의 모든 행적이 성령으로 충만하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자연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이사 35,1-2)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이사 35,1-2.8)

자연은 거칠고 바위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부분으로 크게 갈라져 있습니다. 이 갈라진 형태는 인간의 깊은 죄의 결과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상징합니다. 이 구렁텅이는 너무나 커서 간격을 좁힐 수 없었고 영원히 합쳐질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무너진 빈자리를 메워 다시 연결할 수 있는 누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하느님’만이 해결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무너진 골을 메우시고, 사람과 하느님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십니다. 이것은 그가 사람이었으며, 그리고 하느님이셨기에 가능했습니다.

바위산은 네 개의 산봉우리를 이루며 조화롭게 윗부분의 공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 시각적 구성은 많은 상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한 신비를 증언한 네 복음이 이콘에서는 네 개의 봉우리로 상징화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 안으로 구부러진 정상은 네 번째 복음서를 상징합니다.(요한 복음서) 그것은 다른 복음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면들을 우선하여 설명한 데 비해 어떤 일·사실·사건 등을 통해 숨겨져 있는 영성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기록함으로써,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오신 그리스도를 드러나 보이려 합니다.(작품 2)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골짜기에는 생명을 주는 원천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삭막한 사막과 같은 그곳에 생명의 물이 흘러 꽃을 피우고 나무가 자라서 맛있는 과일들이 열리고, 아름다운 새와 곤충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에덴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즉 이는 네 복음을 통해 무한한 생명을 주는 생명수가 흘러나옴을 상징합니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며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중략)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하며 본인은 길을 닦는 사람의 역할과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알리려 했습니다.(요한 1,29-34)<계속>

 



김형부 마오로
[가톨릭평화신문 2024-08-28 오후 2:12:10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