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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천주교 동양 전파에 중요한 매개 역할 | 2024-0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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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말·청나라 초 중국에 천주교 본격 전래 선교사들 한문 실력 쌓고 유교 경전 깊이 연구 유교 가르침과 상통하는 종교임을 알리려 노력 천주교의 전래 과정에서 유교는 어떤 도움을 주었습니까? “가톨릭교회는 민족들의 문화를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기에서 온갖 오류와 불순을 정화시켜 그리스도교 지혜로 완성시키고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비오 12세의 회칙 「복음의 선포자들」) 명나라 말과 청나라 초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 전래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에 온 선교사들은 중국의 문화를 존중하여 중국의 유학자들도 놀랄 만큼 한문 실력을 쌓았으며, 유교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중국인들이 이질적으로 여겼던 천주교를 쉽고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천주교가 결코 낯선 가르침이 아니라 유교의 가르침과 상통하는 종교이며, 더 나아가 유교의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는 사상임을 설득하려고 힘썼는데, 이러한 선교사들의 신학을 ‘보유론’(補儒論)이라고 합니다. 곧 유교의 경천애인 사상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애주애인을 설명하고, 유교의 충효 관념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대충대효와 대군대부 사상을 가르치고, 유교의 인(仁)에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삼강오륜 등 유교의 윤리에 그리스도교의 윤리와 계명을 접목시키고, 유교의 조상 제사와 상선벌악 사상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영혼 불멸과 천당 지옥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처럼 유교는 천주교의 동양 전파에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였습니다. 만약 선교사들이 유교의 개념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우월 의식과 자존심이 강했던 중국인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보유론적 저술을 통해서 조선에 전해졌습니다. 초기에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들은 한양과 그 인근의 남인에 속하던 유교 선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실의」 등을 읽으며 천주교를 유교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가르침으로 이해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조선의 상황에 맞게 더욱 실천적 신앙으로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교와 천주교의 만남은 조선의 천주교 전파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조선의 정치 사회적 이념이던 유교가 천주교 박해를 일으켰습니까? “여러 시대에 걸쳐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들은 지극한 수고와 노력과 사랑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연구들을 하였고, 이로써 다양한 민족들의 문화와 제도를 깊이 알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쉽게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그들의 영적인 자질들을 육성하고 장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비오 12세의 회칙 「Summi Pontificatus」)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당시 신구 문화가 빚은 갈등·사회 변혁·정치적 상황 등 복합적 원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계기는 1791년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복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위패를 불태운 진산(珍山)사건입니다. 유교의 종교 예식인 제사는 조상을 공경하는 행위로, 효(孝) 정신의 발로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상의 위패를 불사르는 것은 유교의 근본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던 조선의 사회 체제를 부정하는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선조들이 조상 제사를 거부한 배경에는 중국에서 선교 정책을 놓고 여러 수도회가 백 년간 벌인 의례 논쟁이 있습니다. 이 논쟁은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1742년에 조상 제사 금지령을 반포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이 금지령은 1935년에서 1939년 사이에 철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박해가 유교의 일부 가치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것은 맞지만, 제사를 고유한 미풍양속으로 받아들이는 현대 교회의 공식 입장과는 달리, 각 민족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당시 신학과 교황청의 결정도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천주교 박해의 원인을 당시 국가 이념이었던 유교에 한정시킬 수는 없습니다.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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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8-28 오전 11:32:09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