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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성지에 영성 담아내려면 ‘기도하는 성지’ 돼야 합니다 | 2024-08-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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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거룩함을 담아내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200년 전 초대교회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가난하고 소박하고 단순하고 검소한 성지를 만들고 싶습니다 억 단위의 돈을 들여 성지를 경쟁적으로 개발하는 일은 그만해야 합니다 볼 것 없고, 먹을 것 없고, 놀 것 없는 성지에서 할 것이라고는 기도밖에 없는 성지로 만들고 싶은 바람입니다 저는 200년 된 교우촌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 소리가 울려 퍼지고, 신앙 속에서 교리에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일상 그 자체가 거룩함이었지요. 그런데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배출된 공소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텔레비전이 들어오면서 묵주 대신 휴대폰을 들고 잠을 자는 시대가 됐습니다. 박해 시대보다 신앙생활을 하기가 더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지요. 많은 사람이 일회성으로 순례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한 번 걸어서 어떻게 순교자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매주 같은 순례길을 묵묵히 걷고 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죽음을 위해 걸었던 이 순례길을 500번은 걸어볼 계획입니다. 걸을수록 길이 편안해지고, 분심이 덜 들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고 익숙해지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더 깊이 다가옵니다. 걸을수록 순교자들의 숨소리와 거친 신음 소리가 느껴집니다. 문득문득 순교자들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500번쯤 걸은 후에는 나도 순교자들의 모습을 닮은 거룩함이 묻어나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걷고자 합니다. 제가 신학생 때 성냥을 집어달라는 문제로 어떤 사람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성냥을 집어줄까 두드려 팰까 고민했지요. 어머니한테 신학교에서 나올 뻔했던 이 이야기를 했는데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그 쉬운 성냥도 못 집어주면서 그 어려운 신부가 되려 하느냐”고요. 그 말이 신학생 때 내내 저를 지켜주는 말씀이 됐습니다. 죄수들을 입교시켜 함께 참수당하신 박해시대의 한 순교 성인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도 입교시키기 어려운 때에 그 포악한 죄수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얼마나 겸손하고 거룩해야 했을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가 죄수들을 입교시키고자 했던 그 고통에 비하면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러 오며 겪는 일상의 고민과 걱정들은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우리 일상의 불평 불만을 그분의 고통에 견줄 수 있을까요? 성지는 도장을 찍고 사진을 찍으러 가는 곳이 아닙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좋은 경치를 보러 가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러 가는 곳입니다. 순교 성지에서는 생생한 믿음의 현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가 아니어도 성지는 거룩한 곳이기에 자주 방문해서 기도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영광이 됩니다. 감옥에 갇힌 사학 죄인들은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밥 대신 던져주는 볏단을 받았습니다. 그 볏단으로 새끼를 꼬아 겨우 한 끼를 얻어먹을 수 있었지요. 천주학을 하는 사람들은 칼과 족쇄를 차고 있어 새끼를 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고 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찌는듯한 여름의 더위와 밤새 싸우며 날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곤장을 맞고 주리 틀림을 당해야 하는 걱정보다도 감옥에 갇힌 이를 보러 숨어와서 숨죽여 우는 가족들을 보는 것이 더 큰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고문보다 더 큰 배교의 길은 어머니의 울부짖음과 자녀들의 애원이기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만을 되뇌며 형장으로 걸어갔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려니 생각했을 것입니다. 믿음을 갖게 된 것, 감옥에 간 것, 모진 고문을 당한 것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에 원망하는 마음 없이 하느님께 의탁했을 것입니다. 성지는 거룩함을 담아내야 합니다. 영적인 거룩함을 담아내는 데에는 돈이 들지 않습니다. 200년 전 초대교회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가난하고 소박하고 단순하고 검소한 성지를 만들고 싶습니다. 미사 때 봉헌 바구니를 없앴습니다. 순례자들에게 돈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들에게는 무료로 밥을 드립니다. 굶어 죽어 순교한 순교 성인의 애절함을 달래기 위해 공짜로 밥을 주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밥값 따지지 않고, 몇 명이 먹었는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오늘은 성지 계좌의 통장 잔액이 133원으로 찍혔습니다. 133원에 무슨 욕심을 담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가난하고 소박함에서 오는 안락함을 느낍니다. 성지가 소란스러워질수록 영성이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성지에 필요한 기구와 물품들은 얻어오거나 당근마켓에서 중고로 채웠습니다. 유지·관리·보수 비용이 필요하지 않도록 200년 전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글로, 이 성지가 알려져 성지에 사람들이 밀려올까 염려스럽습니다. 숨어있는 성지가 들통 날까 조심스럽습니다. 순교자들이 숨어서 울었던 이곳의 이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싶습니다. 성모님이 좋아하시는 성지였으면 합니다. 순교자 성월, 순교 신심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신자들에게 영적으로 유익이 되길 바라는 그 마음 하나로 글을 씁니다. AI 시대에 교회는 세속의 화려함을 쫓아갈 수 없습니다. 성지가 세속을 따라갈 순 없지요. 미디어 아트로 과거의 박해시대를 재현한다 한들. 열 사람이 묵주 기도를 바치는 것과 로봇 열대가 묵주 기도를 바치는 것이 같을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영성입니다. 한 사람의 회개와 간절한 기도, 정성 어린 전례 행위 하나하나에 중요한 가치가 담겨있습니다. 해마다 가톨릭 신자가 15만 명씩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 억 단위의 돈을 들여 성지를 경쟁적으로 개발하는 일은 그만해야 합니다. 볼 것 없고, 먹을 것 없고, 놀 것 없는 성지에서 할 것이라고는 기도밖에 없는 성지로 만들고 싶은 바람입니다. 순교 성지에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영성을 담아내려면 기도하는 성지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내가 기도하고 싶은 성지를 만들고 싶습니다. 홍보와 광고로 사람이 몰려오고, 사람들이 몰려오면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이면 성지를 더 개발해야 하고···. 유명해질수록 성지는 시끄러워지겠지요. 박해 시대에 순교자들이 숨어서 울면서 온 길인만큼 숨어있는 이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순례길을 오르며 묵묵히 기도합니다. 성지에 오는 이들이 순교자들의 거룩함을 볼 수 있기를···. 나부터 순교자를 닮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 사제 본인의 소속과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요청에 따라 인터뷰한 내용을 편지글로 재구성했습니다. 이지혜 기자 bonappetit@c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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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8-28 오전 11:12:11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