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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신자와 사제, ‘정교분리’ 원칙에도 독립운동 적극 참여 2024-08-28

대구대목구에 모인 드망즈 주교와 뮈텔 주교 등 프랑스인과 한국인 사제들. 프랑스-아시아연구소(IRFA) 제공


일제, 정교분리 원칙 내세워 회유하고 설득

병인박해(1866) 직전 흥선대원군이 베르뇌 주교에게 러시아의 침입을 막아주면 종교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제안을 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협상 전에 박해가 일어났고, 12명의 선교사 중 9명이 순교하였다. 프랑스는 러시아와 긴 협상을 통해 1894년 노불동맹(露佛同盟, 러불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자연스럽게 프랑스 선교사들도 친러시아·반일본 입장을 갖게 되었다.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청일전쟁 이후 고종에게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라고 권유하기도 했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중국 상해에 피신 중인 파블로프(Pavlov) 러시아 공사와 교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안중근 의거를 기점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일제는 천주교와 개신교 등의 선교사들이 국권침탈(한일병합)에 관여할 것을 생각하여, 사전에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을 내세워 회유하고 설득하는 정책을 썼다. 일제는 정치 분야를, 선교사들은 종교 분야를 계도하자는 ‘역할 분담론’을 내세우고 연회를 베풀며 선교사들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이 되자 ‘사립학교 규칙’과 ‘포교 규칙’을 공포하여 교회의 교육과 선교활동을 제한시켰다. ‘포교규칙’을 통해 물적·인적 자원을 감시하는 한편, 포교 방법까지 명시하도록 했으며 심지어 조선 총독이 포교 관리자(주교)를 변경할 수 있다고까지 규정하였다. 이는 천주교에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협상을 통해 천주교에 관해서는 예외 규정을 두었다.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경성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와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은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2019년 3월 5일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 3·5 만세운동을 기념해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와 사제단, 대구가톨릭대 학생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안악 사건’·‘105인 사건’ 등 항일 운동 가담

한일병합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로 인해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매우 어려웠다. 천주교 신자는 교회 당국이 요구하는 규율에 의해 감시와 제재를 받고 있었기에 독립운동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일부 신자들은 ‘안악 사건’과 ‘105인 사건’ 등 중요한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몇 가지 천주교 독립운동 사례를 정리해본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안명근(야고보)과 김구·원행섭 등이 체포되었는데, 이를 ‘안명근(安明根) 사건’ 혹은 ‘안악 사건’이라 한다. 어린 시절 사촌 형 안중근(토마스)을 잘 따랐던 안명근은 황해도 청계동에서 빌렘 신부를 돕다가 안중근의 체포와 사형 이후 북간도로 망명했다. 그리고 의병을 모집하면서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황해도 안악과 신천 등지에서 모금 운동을 벌였다. 천주교 신자를 중심으로 이뤄진 이러한 움직임을 주시하던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이를 알렸고, 뮈텔 주교는 다시 총독부에 고발했다. 일제는 안명근의 모금 운동을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 음모 사건으로 날조해 그와 동료들을 체포하고 종신형과 15년형 등 징역형을 선고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서울과 대구에 있는 신학교 일부 학생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교회 책임자들은 이를 정치에 관여하는 행위로 보고, 학생들을 퇴학 조치했다. 대구 신학교의 경우, 조기 방학해 학생들을 귀가시키기도 했다. 뮈텔 주교는 ‘독립운동을 하려면 신학교를 나가라''고 위협했고, 그해 사제서품식을 무기한 연기하기도 했다. 또 해주·강화와 광주(廣州)의 구산(龜山)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한 신자들이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천주교 측의 독립운동에서 유명한 일화는 북간도 지역 용정(龍井)본당에서 일어났다. 한반도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3월 13일 정오 성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1만 명 이상의 군중이 용정 시내에 모여 ‘독립 축하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회장이었던 김영학의 ‘독립선언 포고문’ 낭독에 이어 군중들의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벌인 독립 시가행진 중 일제의 압박을 받은 중국 군대의 사격으로 시위대 17명이 순국했다. 3·1 만세운동에 나선 전국 보통학교 학생들 가운데 천주교인도 다수 참가했다. 인천의 박문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대구의 해성학교 학생들도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다 체포됐다.
 

앙투안 공베르 신부


교회 지도자, 독립운동은 정치 간여로 인식

일제 강점기 교회의 지도자들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주를 이뤘다. 식민지를 용인하던 당시 그들의 인식 속에는 독립운동이 정치에 간섭하는 행위로 간주됐기 때문에 신자들의 시위 참여를 철저하게 금지했다. 이에 다른 종교인 중 어떤 이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가톨릭 성직자와 신자들을 죽이겠다’며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겉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앙투안 공베르(프랑스인) 신부나 윤예원(한국인) 신부처럼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도와주었던 사제들도 있었다. 그 밖에 천주교 신자들로 구성된 ‘의민단(義民團)’이라는 무장 투쟁 단체도 있었다. 의민단은 다른 독립군 단체와 연합해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고 자금을 모금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해 유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개정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해 사립학교에서 종교교육과 종교의식을 허용하도록 했다. 또한 ‘포교규칙’도 개정해 교회의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꿨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만 회유책을 쓴 것이었다. 그 내막에는 종교 기관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1920년 설정된 원산대목구 관할 지도(붉은 선).


1911년 서울대목구·대구대목구로 첫 분리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조선대목구는 처음으로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북쪽 지방까지 포함해 세 지역으로 나눌 계획이었으나, 우선 남부 지역을 두 개의 대목구로 분리했다. 9년 뒤 북쪽도 분할해 성 베네딕도회가 원산대목구를 담당하도록 했다. 대구대목구가 설정될 때 조선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는 모두 49명이었다. 그 중 서울대목구 소속은 주교 1명과 선교사(신부) 33명이었고, 대구대목구는 드망즈 주교를 포함해 15명이었다. 한국인 사제는 15명 가운데 10명이 서울대목구 소속으로 남았다.

1920년 원산대목구가 설정돼 함경도와 간도 지역이 분리되자 서울대목구 관할 구역은 축소됐다. 아울러 1923년부터 미국의 메리놀외방전교회가 평양에 진출해 프로테스탄트(개신교)와 경쟁하며 선교했고, 1927년 마침내 평양지목구가 설정됐다. 그리하여 서울대목구는 서울과 경기·충청·강원·황해도에서의 사목만을 담당하게 됐다. 1936년 기준으로 서울대목구 신자 수는 모두 6만 4487명이었는데, 이는 조선 교회 전체 신자 수(14만 9732명) 약 43%에 해당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가톨릭평화신문 2024-08-28 오전 9:52:00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