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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21주일 2024-08-21

요한복음 6장의 말미를 마주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합니다. 하지만 네 복음서 모두가 이 이야기를 전한다고 해서, 그 태도까지 같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특히 세 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 복음서는 빵이 많아졌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매조짓습니다만, 요한복음서는 바로 그 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시고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의 관점은 다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를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그 긴 ‘생명의 빵’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복음은 제자들의 반응부터 전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 긴 이야기에 대한 ‘한줄평’ 혹은 ‘댓글’ 정도가 되겠지요. 새 번역 성경이 ‘거북함’으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는 ‘스클레로스’(σκλη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담은 그 단어를 조금씩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공동번역) “이 말씀은 모질구나. 누가 차마 그것을 귀담아들을 수 있겠는가?”(200주년 신약성서)


세 가지 번역은 어떤 부정적인 반응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닮아있습니다만,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거북하다’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어렵다’는 말에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느낌이 강하고, ‘모질다’는 낱말에서는 당혹감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듣고 있다’, ‘알아듣다’, ‘귀담아듣다’라는 표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번역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먼저는 제 그리스어 실력이 짧은 탓입니다만, 무엇보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의 생각을 한 문장에 담아내기는 어렵다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스클레로스’라는 낱말을 저마다 조금씩 달랐을 부정적 감정의 그릇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 낱말을 그렇게 사용하면, 저 번역들은 읽는 사람들의 여러 마음도 담아낼 수 있을 겁니다.


‘생명의 빵’ 이야기를 돌아다보면, 솔직히 불편한 지점들이 있습니다. 그 대화에서는 예수님의 뜻과 사람들의 욕구가 끝없이 어긋나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기어코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굳이 들추고 헤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그래도 사람들은 묻기도 하고 청하기도 하는데,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33.35.51절) 사람들은 이 말씀 앞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집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2절)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칙 안에서 의문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날 그곳의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을지 알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습니다. 문장에 기대어 대화에 뛰어든 우리는 저마다 무엇을 느낄 것이고, 그렇게 질문을 할테니까요.


사람들은 떠나고 제자들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물끄러미 물으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새 번역, 공동번역) 그런데 누군가는 이 말을 다르게 옮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걸려 넘어지게 합니까?”(200주년 신약성서) ‘귀에 거슬리다’와 ‘걸려 넘어지다’는 번역의 원문은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ζω)랍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대개 ‘죄를 짓다’(짓게 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스칸달론’입니다. 이 낱말에는 ‘장애물’(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 같은)의 의미가 있습니다. 추문을 뜻하는 ‘스캔들’이 여기서 나온 말이지요. 하지만, 다른 사용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걸음이 멈추듯이, 말씀을 듣다가 어떤 낱말이나 표현에 마음이 멈추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교양인들과 어떤 교부는 그런 순간을 ‘스칸달론’이라고 표현했다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쪽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스클레로스’에 표현한 사람들의 마음은 ‘스칸달리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복음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 빵을 먹은 사람은 오천 명이 넘었는데, 이제 남은 사람은 열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예수님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열두 제자들은 남았습니다. 베드로는 질문을 멈추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시작하여 생명의 빵 이야기를 따라 듣는 동안, 어느 땐가 우리의 발걸음은 멈추고, 때로는 불편한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계속 따라간다면, 언젠가 우리의 걸음은 다시 멈추고, 그만큼 자주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질 겁니다. 하지만 이 걸음을 포기한다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며 어떤 힘을 낼지 영영 알 수 없겠지요. 열두 제자를 향하던 질문이 우리에게도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가톨릭신문 2024-08-21 오전 8:32:12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