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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 2024-0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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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새워 양 지키는 목자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상징 목자들에게 주어진 기쁜 소식 전해야 할 의무에서 사도들의 모습도 연상 <앞글에 이어> 그 근방의 들판에서 밤을 새워가며 목자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영광의 빛이 그들에게 두루 비치면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목자들이 겁에 질려 떠는 것을 보고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루카 2,8-10) 목자들? 왜 목자들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권력이나 재력이 있는 모든 고관대작을 제치고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목자, 또는 목동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할까? 여기서 목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밤을 새워가며 양을 지키는 그들은 새벽이 오기를 누구보다도 기다립니다. 들짐승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해야 하는 그들의 처지에서는, 새벽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어둠 속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민족도, 또 수천 년 동안 구세주를 기다리며 백성을 이끌어야 했던 예언자들 모습도 연상됩니다. 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 ‘주님을 기다리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에게 오시는 빛, 밝은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물가로 양들을 이끌어 마른 목을 축이게 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그들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급하신 착한 목자의 전조처럼 보입니다.(이사 40,11; 요한 10,11-16)(작품 1) 그들에겐 이 복음을 알려야 할 의무도 주어집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합니다.(루카 2,17) 이들에게 주어진 의무에서 훗날 사도들의 모습도 연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작품 2) 천사들은 목동들을 진정시키면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1-12)라고 했습니다. 구유는 알아볼 수 있는 표징으로 등장합니다. 실제로 아기를 낳아 구유에 눕히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구유에 눕힌 것은 ‘표징’의 의미로서 묵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 이콘에는 피리를 부는 목동과 짖어대는 개를 등장시켜 이 기쁜 소식을 더욱 강조합니다. 이는 하늘의 노래와 지상의 기쁨을 대치시키는 모습입니다. 동굴·성모·아기·동물 이콘의 중앙에 있는 산에는 열린 동굴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는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물 방이 없었다.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혔다’(루카 2,7 참조)라고 되어 있습니다. 방이 없어 구유에 눕힌다는 것은 절박한 상황임을 드러냅니다. 근처에 아무도 살지 않는, 즉 목동들이 양을 치는 외진 곳임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관 밖에 자리한, 여행객들이 타고 온 말들을 관리하는 외양간일 수도 있고, 투숙객이 가축 냄새를 피할 수 있도록 한 외진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곳이 동굴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콘에서는 사실적 표현보다는 관계된 많은 것들을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아마도 이 이콘에서는 외양간을 동굴로 상징화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콘에서 성모 마리아는 동굴 밖에 등장합니다. 몸을 반쯤 구부린 채 피곤한 모습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성모님은 아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 쪽으로 향해있으며,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급박한 상황에서 임신한 몸으로 겪은 힘든 여정, 목동들의 천사 목격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천사의 알림 등을 떠올리는 듯합니다. 또 아드님의 초라한 탄생의 의미, 무언가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요셉의 표정 등 많은 것을 생각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 관한 생각이라기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본인에게 다가왔던 하느님의 섭리와 주변 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모습에서 기쁨만이 아니라 어머니로서 인간적인 고뇌, 슬픔 등도 읽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산 중간 아기 예수 곁에 있습니다. 산은 앞서 말한 대로 하느님을 의미하기에, 아기 예수와 가장 가까운 분임을 드러냅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가까이 그릴 수는 있으나 여기서는 ‘가장 가까우신 분’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모님의 눈은 하느님의 눈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자색 겉옷(마포리온)의 머리와 양어깨에서는 상징적인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선택한 완전한 은총을 의미합니다. 즉 하느님을 잉태하신 분으로서 탄생 이전이나 임신 기간이나 탄생 이후에도 영혼 안에서, 육체에서도 영원한 동정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녀가 낳으신 분은 하느님이셨기에 그 본성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고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찬양하였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염할 때에는 먼저 온 몸을 깨끗이 씻기고 얼굴을 곱게 다듬은 뒤 정갈한 옷을 입힙니다. 그리고 옷과 주변 매무새를 잘 정리하고 탄탄하게 묶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정녀와 동굴 입구 사이의 아기를 보면 흡사 시신을 묶듯 포대기로 차곡차곡 감아서 마치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면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이 표징이라는 말을 전합니다.(루카 2,12) 금방 태어난 아기를 구유에 눕힌 것이 어째서 ‘누구인지 또는 무슨’ 표징이 될까? 현실은 마땅히 쉴 만한 방이 없어서 구유에 눕혔을 터이지만, 하느님의 특별하신 의도가 함께하심을 알게 됩니다. 구유는 ㅡ ‘돌아가심을 그리고 동굴 밖에 내어놓으므로 부활하심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ㅡ 시신을 담는 관(棺)을 의미합니다. 죽은 사람처럼 천으로 십자형으로 또는 엮듯이 감아놓은 모습은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요한 11,34-44)의 모습과 같습니다.(작품 3) 동굴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옛 교부들의 찬미 노래와 복음서 일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마스쿠스 성 요한은 복음을 인용하여 “동정녀에 의해서 영광의 왕이 나셨습니다. 그는 자주색 옷을 두르시고 억눌린 자를 찾아보시며 어둠 속에 갇혀있던 그들의 해방을 알리십니다”(루카 4,18-19 참조)라고 하였고, 예루살렘의 키릴(315-387)1)은 “주께서는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고 그의 몸은 죽음이라는 용을 유혹해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쓰였습니다. 그 용은 그를 삼키러 나왔으며 삼켰다고 자만했지만, 다시 토해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동굴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동굴은 아기를 삼키려고 열려있는 괴물의 아가리이며, 죽음이고, 무덤 속입니다. <계속> 각주 1)예루살렘의 주교, 성 키릴루스 또는 치릴로. 이단을 단호히 배척하고 성삼교리 확립에 대한 공헌과 성체성사에 참된 현존을 명확히 가르침. 김형부 마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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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8-14 오후 1:52:11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