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 쪽방촌에 쿨링포그가 작동되고 있다. 한 주민이 집 밖으로 나와 더위를 식히고 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기상 ‘입추’(7일)가 훌쩍 지났다. 그러나 푹푹 찌는 여름의 기세는 아직 꺾일 줄 모른다. 여전히 체감 온도 섭씨 35도가 넘는 폭염이 이어지고 높은 습도까지 더해져 전국이 거대한 찜통 같다.
정부는 2018년 폭염을 자연재난으로 규정하고, 폭염 취약계층을 지원하고 있지만, 한시적 대책이 아닌 주거환경개선 등 근본 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폭염에 무방비로 노출된 쪽방촌 주민은 여름이 끝나기만을 바라며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수많은 상점이 에어컨 빵빵한 여름을 나는 중에 선풍기 하나 없이 온몸으로 더위를 맞는 이들이다. 9일 이상고온 속 가장 취약한 환경에 살아가는 서울 영등포 쪽방촌 주민들을 찾았다.
도재진 기자 djj1213@ 박민규 기자 mk@cpbc.co.kr
서울 영등포 쪽방촌에 사는 주민들이 집 밖으로 나와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요셉의원 자원봉사자들 활약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 돌며 얼음물 나눠주고
건강상태 점검 등 노숙인과 주민 돌봐
기후변화에 따른 장기적 대책
지자체의 임시방편적 지원 아닌
주거환경 개선 등 근본적 대책 요구 높아져
열린 교회로서 쉼터 제공 등 의식 개선돼야
쪽방촌의 여름
휴대전화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전국 대부분 폭염경보. 체감온도 섭씨 35도 이상?.’ 정부의 안전 안내문자였다. 영등포 쪽방촌을 찾은 9일은 가만히 있어도 이내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그늘이 없는 곳에서는 서 있기 어려울 만큼 무더웠다. 간간이 부는 바람도 높은 기온 탓에 후텁지근 했다.
쪽방이 빽빽한 구역으로 들어서자 왠지 더 덥고 습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골목은 높은 기온과 습도, 악취가 뒤섞인 채였다. 주민들은 그늘에 모여 앉아있거나 쓰러지듯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집안 더위를 피해 집 밖으로 나온 것이지만, 부채 하나로는 도무지 더위를 쫓을 수 없다. 오후 3시, 낮 기온 34도. 인근에 설치된 쿨링포그(Cooling Fog, 정수 처리한 물을 특수 노즐을 통해 인공 안개로 분사해 주는 기계)가 작동했지만, 숨 막히는 더위에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
“아우 더워라.” 한 주민이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다른 주민은 “더워서 견딜 수가 없다”며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1평 남짓한 찜통 쪽방에 사는 이들에게 여름은 피할 길 없는 무서운 계절이다.
요셉의원 봉사자가 거리에 누워 있는 노숙인을 돌보고 있다.
요셉의원의 손길
이날 같은 시각 요셉의원 봉사자들이 더위를 잠시나마 물리쳐 줄 슈퍼맨이 됐다. 얼음물과 두유를 양손 가득 들고 쪽방촌 일대를 찾은 것이다. “시원한 거 하나만 주세요.” 봉사자들을 본 쪽방촌 주민과 노숙인들은 앞다퉈 얼음물을 요청했다. 얼음물과 두유를 받아 든 이들은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 봉사자들에게 “감사하다”며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머리는 언제 다치셨어요? 꼭 소독하러 오세요.”, “어머니, 오늘 몸 상태는 어떠세요?” 봉사자들은 음료를 건네는 동시에 그들의 건강상태를 살폈다. 햇볕 아래 누워있는 노숙인들은 그늘로 이동시켰다. 봉사자들은 그렇게 영등포역 일대를 두루 돌아다니며 쪽방촌 주민과 노숙인들을 돌봤다.
봉사에 참여한 김원혁(요셉, 의예과 2학년)씨는 “봉사하면서 특히 여름철 도움이 더욱 절실한 이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아 졸업 후 의사가 돼 이분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김규태(토마스아퀴나스, 서울대교구 1학년) 신학생은 “요셉의원에 오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방문 지원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체감했다”며 “기후변화로 무더위나 추위가 극심해진 기후변화의 상황에서 종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고 적극 도와야 겠다고 여겼다”고 전했다.
김정애(요안나) 사회복지사는 “쪽방촌을 방문하는 이유는 생활의 어려움으로 의원 왕래조차 어려운 이웃들이 많기 때문”이라면서 “고립된 그들을 찾아내 사회로 이끌어내는 것이 목표”라며 시민들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
요셉의원은 방문 진료를 통해서도 쪽방촌 주민들의 건강을 살피고 있다. 최근엔 많은 젊은 의사가 봉사하겠다며 요셉의원을 찾아오고 있어 방문 진료를 강화할 계획이다. 고영초(가시미로) 원장은 “우리가 돌봐줘야 할 사람이 참 많음을 느낀다”며 “앞으로 좀더 열악한 상황에 처한 이웃에게 관심을 더 쏟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폭염에 따른 주거 취약계층 지원
기후변화로 강력한 무더위가 해마다 이어지자 지자체들이 나서고 있다. 서울시는 이번 여름 동안 서울역 등 노숙인 밀집지역을 대상으로 혹서기 응급구호반 52개 조를 편성해 하루 4회 이상 순찰과 상담으로 응급상황에 대처하도록 했다. 또 노숙인 전용 무더위 쉼터 11곳, 쪽방촌 주민 무더위 쉼터 7곳을 운영하고 쪽방촌 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동행목욕탕 4곳을 밤 더위 대피소로 활용하도록 했다. 시는 2022년부터 공용 에어컨도 지원하고 있다.
부산시는 무더위 쉼터 910여 곳 운영과 함께 노숙인에게 임시 주거비를 지원한다. 쪽방촌 주민과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현장대응 전담팀도 운영하고 있다. 또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재해구호기금 1억 원을 맡겨 쪽방촌 주민에게 냉감 이불 같은 냉방용품·구호식품 등을 지원하도록 했다.
대구시는 쪽방촌에 에어컨을 설치하고 전기요금을 지원하고 있다. 또 폭염을 대비해 쪽방촌 통합돌봄 모니터링단을 구성, 안부를 확인하고 냉방물품을 제공하도록 했다.
땜질 처방 아닌 근본 대책 필요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부와 지자체의 폭염 관련 대책이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았다. 주거환경 개선 등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박상훈 신부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하지만 지금 쪽방촌 상황은 인간다운 주거라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박 신부는 “지자체가 폭염 취약계층을 위해 지원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임시방편일 뿐”이라며 “가장 시급한 일은 기후변화에 따라 새로운 종류의 개선된 주거지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대주택을 늘려 이들을 수용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도시연구소 이원호 책임연구원은 “빌딩에서 내보내는 열기가 쪽방촌을 뜨겁게 달궈 열섬으로 만들고 있는 데다, 쪽방촌은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조차 제대로 놓을 수 없는 열악한 공간”이라며 “기존 집들에 대한 규제나 개선이 없는 상태에서 쪽방촌 폭염대책은 무용지물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원은 “쪽방촌의 경우 공공주택사업을 통해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 주거 안정을 이룰 수 있다”며 “기존 도심 생활권의 노후주택들을 매입해 에너지 효율 주택으로 전환하는 방법과 매입임대주택 공급이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교회가 무더위와 추위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공간 제공과 의식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나충열 신부는 “기후위기 직격탄을 맞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 특히 주거 취약계층이 그러하다”며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혹서기와 혹한기에 더욱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만큼 지자체 차원에서 무더위 쉼터를 운영하는 것처럼 성당이 운영하는 카페나 공간도 특정 시간에 무더위 쉼터로 운영하면 어떨까 생각한다”고 제안했다. 나 신부는 “함께 어려움을 젊어진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향해 더욱 열려있는 교회가 돼야 한다”며 “교회 내적인 활동과 더불어 계절적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해 신앙인들의 의식도 개선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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