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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20주일 | 2024-0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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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동안 복음 말씀은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빵’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빵’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의미인지, 나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인지를 묵상하게 이끕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지난 주 복음은 이 말씀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이 이번 주 복음의 첫 문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걸까요? ‘살아 있는’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봅니다. 2019년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가 발표되었습니다. 청년을 주제로 한 제15차 세계주교시노드의 후속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발표한 사목적 권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000년 전에 사셨지만, 교회는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 계신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스스로를 ‘살아 있는’ 빵이라고 말하신 것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즉, 예수님이 생물체로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살다 가신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죽어야만 만날 수 있는 미래의 분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인생 여정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전기 혹은 역사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가 만나는 현장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을 묵상합니다. 다음으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는 문장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특히 ‘살과 피’라는 단어가 다가옵니다. 아마 대부분 신자는 ‘살과 피’를 통해 성찬례를 떠올릴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성변화(聖變化)’된 ‘살과 피’를 모십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살아 계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모신다는 것이 내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충만하게 주어지는 은총의 의미를 모른 채 그냥 관습적으로 혹은 별 의식 없이 전례에 참여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몸(살)은 예수님이 살아온 인생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몸을 갖고 사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유한하듯 몸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그 유한한 인생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에 맞게 살아가신 인생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이렇듯 유한한 인생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 삶을 따라가는 사람은 유한한 인생을 통해 영원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당신의 피를 나누신다고 만찬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동료 이웃들에게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삶이 죄에 빠진 삶입니다. 그런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랑의 삶이 예수님의 인생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사랑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그런 당신의 몸(살)과 피를 나누신다는 것은 우리를 예수께서 걸으신 사랑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나만을 위한 인생, 하느님 없는 인생이 아니라 하느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세상 속에서 동료들과 사랑을 나누는 인생으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를 다시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묵상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며 살아보려고 애쓰고,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그분이 믿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내 안에 머무르고 내가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느님도 ‘살아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내 삶과는 무관하게 저 멀리 높은 곳에서 관찰하는 분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사랑을 나누시는 분이시기에 내 삶과 늘 함께하십니다. 그런 분이 하느님 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내 삶의 근본적인 힘으로 삼는 것을 ‘말미암아’ 산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에 그런 예수님의 인생을 내 삶의 근본적인 힘으로 삼는 것도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오늘 1·2독서는 모두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 세상의 논리에 따라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은 사라질 빵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먹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인생과 그분이 알려주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만을 능력이자 지혜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늘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는, 우리의 욕망과 기대와는 동떨어진 대답만을 하실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에게 믿을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먹고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오늘 복음은 묻고 있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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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8-14 오전 8:32:10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