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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지에서 하얼빈까지…독립 꿈꾸던 선조의 열정 헤아리며 2024-08-13

강우일 주교(베드로·전 제주교구장)가 지난 6월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가 주관하는 중국 평화 순례를 다녀왔다.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이들의 평화를 향한 열정을 배운 강 주교의 순례기 전문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 [ 강우일 주교 특별기고 - 만주 벌판을 거닐다(1) ] 바로가기
>>>> [ 강우일 주교 특별기고 - 만주 벌판을 거닐다(2) ] 바로가기


옌지에서 하얼빈까지…독립을 꿈꾸며 말 달리던 선조들의 열정 헤아리며


백두산 여행을 마친 우리는 다시 옌지(延吉, 연길)로 가서 기차를 타고 마지막 목적지인 헤이룽장성(黑?江省, 흑룡강성) 하얼빈(哈??, 합이빈)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는데도 또 입국 단체 비자 발급 순서대로 줄을 서서 여권 사진을 보여주고서야 승차가 허락되었다. 중국 여행 내내 우리는 정부 당국의 감시하에 있음을 절감하였다.


옌지에서 하얼빈까지 고속철도로 가는데도 4시간이나 소요되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4시간의 기차 여행 내내 우리는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만주벌판을 바라보았다. 옛날 만주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말 달리던 우리 선조들의 기상과 뜨거운 열정을 마음속에서 헤아리다 보니 4시간이 전혀 길게 느끼지 않았다.



하얼빈은 헤이룽장성 성도(省都)로 인구가 900만 명이 넘는 대도시다. 하얼빈은 1898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장하며 상당한 투자를 하여 도시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러시아가 청나라 땅을 가로질러 철도를 세울 수 있던 것은 청의 국력이 매우 약화하여 서구열강의 간섭과 침탈을 막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후 하얼빈을 빼앗겼다. 하얼빈은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자 중국으로 귀속되었다. 그래서 하얼빈 곳곳에는 러시아풍의 건축물이 눈에 띈다.


하얼빈의 중심가에는 지금도 러시아 시대에 돌로 포장된 도로와 건물들이 즐비하고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었던 소피아 성당이 보존되어 있다.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된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이었으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문을 닫았고 지금은 관광명소로 개방되고 있었다.


외양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옛날 성당 내부의 이콘과 제대 등 성물은 모두 훼손되어 사라졌고, 제대가 있던 자리에서 젊은 음악가 몇이 버스킹 형태의 공연을 하고 있었다. 엄숙하고 장엄한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자취는 사라지고 무신론자와 여행객이 심심풀이로 들러보는 관광지로 퇴색한 모습에서 서글픔과 쓸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북만주 하얼빈에서 만난 신앙의 가족


그런데 하얼빈에 천주교 성당이 또 한 군데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여행 일정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단 들려보기로 했다. 천주교 성당인데도 건축양식은 성 소피아 성당과 같은 비잔틴 양식이었다. 그러나 성당 정문 위에 분명히 ‘천주당’이라고 굵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성당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문은 닫혀 있었고 관리실이나 사무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쉽지만 그냥 겉모습만 본 것으로 만족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성당 마당 한쪽에서 망중한을 즐기던 한 할아버지가 우리 일행에게 다가오더니 우리에게 열심히 말을 걸었다. 우리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 눈치였다. 한국에서 왔다 하니, 할아버지는 앞으로 20분 정도 후면 문이 열린다고 했다. 가이드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것인지 다음 일정으로 옮겨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모처럼 하얼빈에서 천주교회를 발견했으니 다음 일정을 위한 시간을 조금 줄이더라도 현지 성당을 방문하고 가자고 했다.


성당 마당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노인들 주변을 20분 정도 오락가락하며 기다렸더니, 굳게 닫혔던 성당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안에서 열렸다. 관리인 같은 제복을 입은 여성 둘이 우리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꽤나 높은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니 중앙에 제대와 감실이 있고, 예수님과 성모님 성상들이 자리 잡아 가톨릭교회의 성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었던 소피아 성당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현재도 성당으로 활용되고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제대 앞에 자리 잡고 앉아 하얼빈의 교회공동체가 신앙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지향으로 함께 기도하였다.



기도를 마친 다음 일어서자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인사하러 다가왔다. 한국에서 주교와 신자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다. 휴대폰 통역기를 동원하여 언제 세례를 받았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자기 집안이 4대째 신자 가정이라고 했다.


조상 대대로 신앙을 지켜온 그녀는 한국의 주교와 신자들이 여럿 방문해 준 것이 너무 반갑고 감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통역이 없어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으나, 북만주 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중국 신자와의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 국적과 민족을 초월한 같은 신앙의 가족을 만났다는 기쁨과 감동을 맛보게 하였다.



우리가 하얼빈을 찾은 이유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장소와 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평소 매년 3·1절이 되면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천주교 신자나 성직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고 송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중에 일본 제국에 정면으로 저항하다 순국한 가장 대표적인 인사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면 큰 위로와 자긍심을 되찾곤 하였다. 이번 여행을 앞두고 나는 다시 한번 안중근 의사의 생애를 돌이켜 보며, 불의한 침략을 감행하여 국권을 강탈한 일본 제국과 싸우기 위해 만주 벌판을 내달리고 자신의 생명을 불사른 그분의 결연한 의거와 희생에 경이로운 숭경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는 사실 마음 한구석에 안중근 의사에 대한 존경과 경외의 정을 간직하면서도 다른 한구석에는 사람을 살해한 죄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가 정리되지 않는 한가락 혼란스러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안 의사가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를 통해 밝힌 이토 저격의 15가지 이유를 돌아보며, 그분의 행동이 한 개인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의병장으로 감행한 정당방위의 전투행위였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얼빈 역사(驛舍) 한쪽에 마련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安重根?士?念?)에는 입구에 안 의사 등신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전시실에는 그분 생애와 활동, 그리고 뤼순(旅?, 여순) 감옥 수감 중 남기신 유묵(遺墨,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장소의 표시였다. 현재도 사용 중인 하얼빈 기차역 플랫폼 바닥에 안 의사가 섰던 자리에는 세모가 그려져 있고, 이토가 서 있던 자리에는 네모가 그려져 있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건립한 중국 정부가, 불의한 외세의 침탈에 저항하고 자신의 생명을 바친 안 의사에 대해 그들 나름의 존경심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2월 14일 뤼순의 일제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는 당시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어 사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뮈텔 주교는 일본 제국과 조선 천주교회의 관계 악화를 염려하여 사제 파견을 거절했다. 그러나 안 의사의 동생들을 통해 뤼순 감옥 방문을 직접 요청받은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뤼순을 방문하고 안 의사를 만났다.


빌렘 신부는 3월 7일 뤼순에 도착하여 3월 8일부터 11일까지 4차례의 면회를 하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풀었다. 이 일 때문에 그는 뮈텔 주교에게서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나중에는 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나, 훗날에도 자신이 취한 행동은 정당했음을 밝히고 있다.


빌렘 신부는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 장상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공유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에도 문의한 결과 포교성성장관은 뮈텔대주교가 빌렘 신부의 뤼순행 허락을 거절한 것이나 성무집행 정지를 내린 처사가 공정하지 못했다고 1913년 7월에 회신하였다.


교황청의 이런 회신에도 불구하고 뮈텔 주교와 조선의 파리외방선교회 성직자들은 빌렘 신부가 취한 행동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빌렘 신부는 1914년 2월 뮈텔 주교에게 1년간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그에게 서울교구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빌렘 신부는 1914년 4월 22일 유럽을 향해 출발, 5월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인 로렌에 도착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휴가를 보낼 마음이었으나 두 달 후에 발발한 1차대전으로 인하여 결국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안 의사의 거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가 취한 행동과 선택의 정당성을 성찰하고 우리 자신의 판단 기준과 입장을 정립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못가에 봄풀 돋아나듯’ 
죽어서도 염원했던 안 의사의 염원과 희망을 바라보며


우리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안 의사가 동지들과 모여 거사를 결정했던 자오린(兆麟, 조린) 공원을 방문하였다. 자오린 공원은 도심이지만 시민들이 자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여러 식물과 잔디밭이 여유롭게 펼쳐져 있었다.



공원 한쪽 구석에는 허리만큼 오는 둥그런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그 가운데에 한자로 ‘청초당’(?草塘)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못가에 파란 풀이 돋아난다’는 뜻으로, 못가에 봄풀이 돋아나듯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도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세상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안 의사의 염원과 희망을 담은 글씨다.


그 좌측 하단에는 안 의사의 단지(斷指) 손도장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도 기울어져 가는 석양빛을 맞으며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안 의사는 조국의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자신의 유해를 잠정적으로 이 공원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조선천주교회 안에 이런 의인이 우뚝 서 계심을 세계 교회에 자랑하고 싶은 커다란 자부심과 영예를 발견하게 되었다. <끝>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공동대표, 전 제주교구장)

[가톨릭신문 2024-08-13 오후 5:12:04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