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News

  • 전례성사
  • 가톨릭성미술
  • 가톨릭성인
  • 성당/성지
  • 일반갤러리
  • gallery1898

알림

0

  • 가톨릭뉴스
  • 전체 2건

백두산 천지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다 2024-08-08

강우일 주교(베드로·전 제주교구장)가 지난 6월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가 주관하는 중국 평화 순례를 다녀왔다.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이들의 평화를 향한 열정을 배운 강 주교의 순례기 전문을 4회에 걸쳐 소개한다.

 

>>>> [강우일 주교 특별기고] 만주 벌판을 거닐다(1) 바로가기

 

 

윤동주 시인의 생가 마당에 새겨진 여러 시 중에 ‘십자가’라는 제목이 내 시선을 끌었다.

 

 


< 十字架 >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교회당) 꼭대기

十字架(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鍾(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幸福(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십자가)가 許諾(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一九四一、 五、 三一、)

 

 

이 시에서 나는 25세의 청년 시인 윤동주가 당시 조선 민족이 겪었던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과 그 안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르는 길인가를 처절히 고민하고 자문하며 자신의 신앙을 민족애 안에 육화시킨 살아있는 신앙인이었음을 절감하였다. 


 

 

1943년 7월 시인은 사상범으로 체포되고 일본 체류 기간 중 썼던 상당한 분량의 시작품과 일기를 압수당했다. 1944년 2월 시인은 법원에 기소되고, 3월31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 형을 선고받은 다음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갑자기 ‘동주 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는 전보가 고향으로 배달되었다. 

 

 

후쿠오카에 달려간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은 같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송몽규를 면회하였다. 몰라보게 바싹 마른 송몽규는 자신도 윤동주도 다른 조선 청년들도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고 했다. 윤동주 사망 후 23일이 지난 3월 10일에 송몽규도 옥사하였다. 오만한 제국의 부당한 억압과 집요한 폭력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추구한 두 청년의 유해는 한줌의 재가 되어 고향 땅 용정 동산 마루에 묻혔다.

 

 

겨레 향한 애틋한 열정으로 스물여덟 청춘 불사른 젊은이의 무덤 앞에서

 

 

시인의 묘소는 명동촌에서도 택시로 10분 정도는 달려야 하는 외곽지대 공동묘지에 있었다. 가는 길이 좁고 험하여 버스 진입이 안 되는 비포장도로라 우리는 택시 세 대로 나누어 타고 가야 했다. 윤동주 시인의 이름과 묘지 장소를 정확히 아는 기사는 셋 중 한 사람뿐이어서 세 대의 택시가 함께 움직였다. 당시 인근 지역에 살던 조선인 개신교 신자들이 묻힌 교회 공동묘지였다. 


 

 

나지막한 봉분이 솟아올라 있는 시인의 무덤에는 나지막한 나무 울타리가 둘러쳐 있고 시인의 함자가 적힌 비석이 서 있었다. 겨레와 조국을 향한 애틋한 열정으로 스물여덟의 청춘을 불사른 젊은이의 무덤답게 수많은 다른 무덤들 틈에 티 내지 않고 숨어있었다. 사촌 송몽규의 무덤도 바로 옆쪽에 있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두 분의 젊은 선각자 앞에 깊이 허리를 굽히고 존경과 흠모의 예를 표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안식을 기도하였다. 

 

 

나는 윤동주 시인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사촌 송몽규 선생은 이번 여행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동갑으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고 동고동락한 동기간 같았다. 동주는 내성적이었고 몽규는 활달하고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시인으로 등단한 것도 몽규가 먼저였다. 일본 유학도 1942년 둘이 함께 가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 응시했으나 몽규는 합격하고 동주는 낙방하여 도쿄의 릿교 대학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바로 같은 해 가을 학기에 동주는 몽규가 있는 교토로 가서 개신교회에서 운영하는 도시샤 대학으로 편입한다. 그러나 이듬해 7월 10일에 몽규가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먼저 체포되고 동주도 나흘 후에 체포되고 같이 고난의 길을 갔다.

 

 

룽징 순례를 마치고 우리는 백두산을 가기 위해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 이도백하)라는 마을로 이동하였다. 백두산 등반객 때문에 새롭게 조성된 리조트 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시골 동네에 백두산을 찾는 등반객들이 늘어나면서 급격히 형성된 상업지구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백두산을 찾는 이들은 한국인이 대부분이었고 이 지역의 개발과 관리는 옌벤조선족자치주의 소관 업무였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경제가 성장하고 관광지 수요가 증가하면서 관광지로서의 백두산의 가치와 전망이 급속도로 부각되었고 지린성 지자체가 백두산 관광 개발 사업을 옌벤조선족자치주에서 지린성 소관으로 이관시켰다고 한다. 그런 이후 지린성 지자체가 백두산 지역에 관광 인프라 조성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를 집중하였고 현대식 숙소와 교통편을 확보하고 중국 전국에 대대적인 홍보 작전을 펼친 결과 지금은 중국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관광리조트로 발돋움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묵은 호텔도 규모로 봐서는 그리 크지 않은데도 내부 시설은 국제 수준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잘 갖추어져 있었다.

 

 

백두산은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가 한 번은 가보기를 꿈꾸는 민족의 명산이다. 우리가 왜 모두 이렇게 백두산을 꿈에 그릴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불러온 애국가 첫마디에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구절이 있다.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두만강으로 흘러 금방 동해로 유입된다. 서해까지는 한참 흘러야 하지만 백두산에서 동해는 훨씬 가깝다. 나는 이번에 백두산에 올라 푸른 천지를 보고서야 애국가의 첫 마디가 더 깊이 가슴에 와닿았다. 

 

 

전날 이도백하 호텔에 여장을 풀었을 때 현지 안내인은 우리에게 중국 일기예보에 의하면 다음 날 비 올 확률이 70%라고 했다. 또 백두산이 워낙 높은 산이라 수시로 기상 변화가 심하고 어떤 변수가 있을지 당일이 되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5분 차이로 어떤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안개가 걷히면서 천지를 살짝이라도 보는 사람이 있지만, 직전에 온 그룹은 못 보고 하산하기도 한다고 했다. 날씨만큼은 인간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좋은 날씨를 주시도록 하늘에 열심히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평균적으로 백두산을 찾는 이들 가운데 청명한 백두산 천지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3분의 1정도 밖에 안 된다고 했다. 날씨가 안 좋으면 가이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미리 참가자들에게 재확인시켜 주고 백두산이 자태를 드러내지 않아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는 예방주사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누가 기도를 열심히 했는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백두산 여행은 지린성 지방정부의 큰 수입원인 듯, 일반 관광버스나 자가용은 백두산 초입에서 모두 하차하게 하고 지자체가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게 되어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셔틀버스도 도중에서 두 번이나 갈아타게 되어 있었다. 경사가 급한 마지막 구간에는 셔틀버스에서 소형 밴으로 다시 갈아타야 했다. 갈아타는 환승장에는 매번 수백 명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외국 공항에서 출입국 수속을 밟거나 보안 검색을 받을 때도 비슷한 기다림을 경험하곤 하지만 사람을 이렇게 남녀노소 상관없이 여러 차례 수백 미터씩 줄을 세우는 일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존중심이나 예의를 도외시한 전체주의 사회의 권위주의적 횡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노약자에 대한 배려나 연민이 자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권력자의 오만한 위세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전체주의 사회에서 이미 오래 살아온 중국인 관광객들은 이런 기다림에 익숙한 듯했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편치 않았던 나의 심기는 백두산 정상을 밟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씻어졌다. 백두산은 정말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하고 싶은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해 주었다. 백두산을 오르는 중산간 지역은 자작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으나 정상 가까이 이르자 나무는 전부 사라지고 아주 낮게 깔린 풀밭에 에델바이스 같은 작은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백두산 천지를 한 눈에 담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를 봉헌하다

 

 

정상에 당도하자 고도 때문인지 화산토라서 그런지 나무는 물론 풀 한 포기 없고 검붉은 토양이 넓게 펼쳐진 광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수많은 인파가 긴 줄을 서서 조금이라도 더 그 장관을 가슴에 새기려는 듯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산 아래에 비해 급격히 떨어진 기온 때문에 배낭에 넣고 간 패딩을 얼른 꺼내입고 우리도 긴 인파의 대열에 떠밀려 천천히 올라갔다. 

 

 

비탈길을 백여 미터 더 오르니 천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뚫린 하늘의 푸르름이 그대로 투사되고 있는 천지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하고 단군신화의 탄생지로 삼았던 연유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천지는 둘레가 14.4킬로미터나 되는 호수로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장대하고 압도적인 자태를 조용히 내보이고 있었다. 

 

 

우리 겨레 영혼의 고향인 백두산을 중국 땅에서 오르는 것이 께름칙하긴 했으나 그곳에서 마음을 모아 주님께 겨레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를 바쳤다. 정상에서 우리 중 누군가가 한반도 형상의 지도가 그려진 옆에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펼치고 사진을 찍으려 하자, 어느 틈엔가 이를 보고 완장을 찬 요원이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플래카드를 압수해 갔다. 그나마 연행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 3회에 계속 >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공동대표, 전 제주교구장)


박주헌 기자 ogoya@catimes.kr

 

[가톨릭신문 2024-08-08 오전 9:12:00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