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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브뤼기에르 주교 임종, 곽 신부가 지켰다 | 2024-0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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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선대목구장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의 임종을 지킨 중국인 신부 는 ‘고 신부’가 아닌, ‘곽(郭) 요한’ 신부로 확인됐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지막 여정에 함께한 사제를 ‘고 신부’라고 불러왔다. 이는 성 모방 신부의 서한을 필두로 한 파리외방전교회 자료에 ‘Ko’라는 성(姓)만 언급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지 기자가 최근 여러 자료를 조사해본 결과, ‘Ko’는 곽의 중국어 발음인 ‘궈’(당시 프랑스식 표기로는 Kouo)의 오기임이 밝혀졌다. 곽 신부는 1835년 10월 7일 중국 서만자를 떠나 조선으로 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지막 여정에 동행한 유일한 사제다. 서만자는 달단(내몽골)에 속한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동료 모방 신부와 1년간 머물며 조선 입국을 준비한 곳이다. 북경에서 추방된 프랑스 선교수도회(Congregatio Missionis, 라자로회 또는 빈첸시오회로 불림)의 새 선교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곽 신부 역시 프랑스 선교수도회 소속으로, 장상인 물리(Mouly) 신부 명에 따라 브뤼기에르 주교와 동행했다. 그는 고된 여정으로 건강이 악화한 브뤼기에르 주교를 세심히 돌봤다. 그해 10월 20일 마가자 교우촌에서 주교가 갑자기 쓰러지자 병자성사를 주고 전대사를 베푼 다음 임종을 돕는 기도를 바친 인물이다. 물리 신부는 1835년 11월 9일 서만자에서 선교수도회 본부로 보낸 서한에서 “중국인 동료 곽(Kouo) 신부를 브뤼기에르 주교의 동반자로 보냈다”며 이렇게 전했다. “(선종 당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평소처럼 명랑했고, 저녁 식사 동안 그곳(마가자)에서 선교활동을 하러 가는 곽 신부와 활발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후 발을 씻고 수염을 깎는 순간 두통이 심해져 곧 말을 할 수 없게 되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 순간 도착한 곽 신부는 병자성사만 줄 수 있었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하자 곽 신부는 자신의 제의 또는 제가 고인에게 선물한 제의 중 한 벌을 입혀 관에 안치했습니다. 또 마가자 교우 모두와 함께 미사도 봉헌했습니다.” 모방 신부가 같은 날인 1835년 11월 9일 서만자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낸 서한 내용도 이와 상통한다. 다만 성을 ‘Kouo’가 아니라 ‘Ko’로 적었다는 차이만 있다. 그는 1836년 4월 4일 조선 한양에서 본부로 보낸 편지에도 ‘Ko’라고 썼다. 이에 지금껏 한국 교회는 그 발음대로 ‘고 신부’라고 불러온 것이다. 1835년 당시 선교수도회에서 ‘곽’이라는 성을 지닌 중국인 사제는 요한(Jean) 신부 한 명뿐이었다. 본지는 1866년 출간된 「선교수도회 회고록(Mémoires de la Congrégation de la Mission) 8권」에 실린 중국 현지인 사제 명단과 「중국 라자리스트 열전(Les Lazaristes en Chine, 이하 「열전」)」에서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열전」은 1697년부터 1935년까지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수도회 회원 964명 약전을 모은 책이다. 2009년 영어로 출간된 「빈첸시오회 : 선교수도회 통사」에는 이같은 내용을 반영해 “곽 요한(Jean Kouo)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를 안내했다”고 쓰여있다. 「회고록」과 「열전」 내용을 종합하면, 곽 신부는 1803년 산동성 제남부의 그리스도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1822년 선교수도회가 운영하는 북경 북당(北堂)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824년 종신서원을 했다. 이어 1826년 사제품을 받은 뒤로 북경 일대(직예)에서 주로 사목했다. 그리고 1851년 3월 6일 직예 하간부 능상사(陵上寺)에서 선종했다. 곽 신부가 48세 나이로 갑자기 선종하자 물리 신부는 애통해하며 이력(약전)을 썼다. 그는 “곽 요한 신부는 훌륭한 사제였다. 선교사를 무척 존경했으며 철저한 순명을 실천했다”고 남겼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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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8-06 오후 7:52:08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