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페 바차니(Giuseppe Bazzani, 1690~1769)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환시. 이탈리아 만토바 두칼레 궁전 소장
교회는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될 때, 그 형상들(species) 즉 빵과 포도주의 외형들과 그것의 물리학적인 요소들은 그대로 남는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경험 가능한 차원에서 볼 때, 축성은 아무것도 변화시키는 것이 없고,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축성한 후에도 ‘빵’과 ‘포도주’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를 축성해도, 빵과 포도주는 외형적으로 빵과 포도주이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그것들은 객관적으로 같은 실재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축성을 거친 빵과 포도주는 초자연적 실재의 참된 객관적 표징으로서 존재한다. 물론 우리의 감각기관은 속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거기에 있는 것, 즉 외형들을 참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지금 그리스도의 표징이며 영적 음식의 표징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바로 ‘신앙’(faith)에 의해서이다.
빵과 포도주의 외형은 그리스도의 몸에 본질적으로 연결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영광스럽게 변모된 그리스도는 어떤 방법으로도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빵과 포도주의 외형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빵과 포도주의 형상들 사이에 유지되는 연결성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힘에 기인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만지거나 접촉하지는 않고, 또한 그 형상들이 손상되거나 불에 태워진다고 하여도,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수난을 겪는다고는 할 수 없다.
신성을 모독하는 본질적 요소는 불손한 배령이나 모독 행위에 의하여 주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려는 의도(intention)에 있다. 빵과 포도주의 외형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고유의 어떤 주체 없이도 그것들은 하느님의 힘에 의해 존재가 계속된다. 이 신적 개입을 인정한다면 그 자연적 질서는 존중되고, 빵과 포도주의 우유성은 그것들이 그 전까지 있어 왔던 모양으로 그 상태를 정확히 그대로 유지한다. 즉, 빵과 포도주의 색깔, 형태, 맛 등은 축성 전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더 진행시켜 보자. 빵과 포도주는 축성이 되더라도 전과 같이 영양분은 지니고 있고 또 부패하기도 한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또는 부패가 발생하기 시작할 때, 그 형상들은 더 이상 빵과 포도주의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므로 표지(Signum)로서의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부패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서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하기를 그친다고 말할 수 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성 니콜라스 대성당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빵과 포도주가 물질적으로 빵과 포도주의 고유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는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 형태가 물리적으로 빵과 포도주라고 말할 수 없게 될 때부터는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아니라 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질적, 때로는 양적인 변화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질적인 변화로서는 빵의 형태가 성체배령 후 소화되는 경우, 또는 보존해둔 성체의 형태가 부패하는 경우를 들 수 있고, 양적인 변화로는 빵의 형태가 소멸된 상태의 빵 부스러기가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빵의 성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된 빵, 그리고 더 이상 빵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부수어진 빵 부스러기 안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와 같이,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21∼1274)는 빵과 포도주의 형태가 인간이 먹기에 적당한 음식인 동안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존이 계속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배령한 후 성체가 소화되기 전에는 인간을 위한 음식이라는 성질을 보존하고 있으므로 그 안에 그리스도는 현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환자가 성체를 배령하고 나서 병 때문에 그것을 토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때 환자 몸 밖으로 나온 성체는 이미 음식으로서의 성질을 보존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 성체의 면형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참된 현존’(the Real Presence)에 대해서는 인정했으나, 이를 영성체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으로만 제한했다.(in usu, non extra) 그래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순간 뿐만 아니라 영성체의 전과 후에도, 또한 그 후에 남겨지는 축성된 제병들(Hosts)에도 현존한다고 정의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지속적인 가르침이었고 또 다른 갈라져나간 형제,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조차도 이를 긍정하였다. 우리의 주님은 성체 안에 참되게 현존하시기 때문에, 감실에 모셔져 있는 축성된 성체는 성체 강복을 할 때, 제단에 모셔진 성체에 대하여 합당한 경배를 드림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은 축성과 함께 시작되고, 빵과 포도주의 형상이 부패해 사라질 때만 끝이 난다.
글 _ 전합수 신부 (가브리엘, 수원교구북여주본당 주임)
1992년 사제수품.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한국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수원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성체성사를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수원교구 청소년국 청년성서부 초대 전담신부, 수원교구 하남, 본오동, 오전동, 송서, 매교동 본당 주임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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