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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는 우리 성인과 복자들(6)] 기꺼이 순교의 길 택한 성 오메트르 신부와 복자 주문모 신부 2024-07-19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선교 열정으로 죽음을 각오해야 했던 조선이라는 선교지로 나선 프랑스의 성 오메트르 신부(베드로·1837~1866)와 중국의 복자 주문모 신부(야고보·1752~1801). 끝내 조선 교회라는 양 떼를 버릴 수 없어 자수로 순교한 오메트르 신부와 주문모 신부의 다르면서도 닮은 삶과 사목활동을 알아본다.


 

 

많이 달랐던 두 인물

 

 

25세에 사제품을 받은 성 오메트르 신부와 40세 경 늦은 나이에 사제품을 받은 복자 주문모 신부. 두 인물은 사제가 되기까지 많이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성 오메트르 신부는 1837년 프랑스 작은 시골 마을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첫영성체 교육을 받으면서부터 일찍이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해 소신학교에 입학한 오메트르 신부는 학업에서도 빛을 발하게 된다. 그는 선교 사제가 되기까지 부모의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했다.

 

 

복자 주문모 신부는 1752년 청나라 장쑤성에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8세 때 아버지를 잃었다. 고모 슬하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스무 살 때 결혼한 뒤 3년 만에 아내와 사별한다. 그는 과거 시험을 준비했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 이는 후에 조선에서 양반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 신부는 뒤늦게 북경교구 신학교에 들어가 제1회 졸업생이 됐다.

 

 

목숨을 건 입국

 

 

성 오메트르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다음 해에 조선에 입국한다. 그는 파리 외방 전교회가 말레이시아 북부 지역의 섬 페낭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두 조선인 신학생을 데리고 1863년 6월 중국 어선을 타고 연평 바다를 거쳐 1863년 6월 23일 조선에 도착했다.

 

 

 

성 오메트르 신부
특유의 성실함으로 서품 받고
조선 신자 성모 신심 위해 노력
성금요일 갈매못에서 순교

 

 

복자 주문모 신부는 42세의 나이에 선교사로 파견된다. 조선 신자들의 부단한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에 대한 답으로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1751~1808)는 조선인과 닮은 주문모 신부를 조선 땅의 첫 선교 사제로 보낸 것이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2월에 북경을 떠났으나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때문에 요동 일대에서 사목을 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다시 밀사들과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그해 12월 24일 밤에 조선에 입국했다.


 

 

각자의 특색 있던 사목 활동

 

 

경기도의 한 지역에서 선교한 성 오메트르 신부와 서울 가회동 일대를 거점으로 두고 사목한 복자 주문모 신부는 각자의 특색이 있는 사목 활동을 했다.

 

 

신학교 시절 세 번이나 성모회장으로 뽑혔던 오메트르 신부는 신자들에게 특히 성모 신심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 활동했던 칼레 신부(1833~1884)는 이렇게 증언했다. “오메트르 신부는 매년 최대한 장엄하게 성모 성월 행사를 거행했으며, 교우들에게 이 아름다운 신심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주문모 신부는 서울 계동의 복자 최인길(마티아·1765~1795)의 집에 머물다가 입국 사실이 적발되자 가회동의 여성 회장 복자 강완숙(골룸바·1761-1801)의 집으로 피신, 사목을 이어갔다. 그는 명도회를 결성, 교리에 밝은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1760~1801)을 회장으로 임명하고 매월 모임을 했다. 이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이들이 많았는데 이 중 3분의 2가 여성이었다고 한다.

 

 

 

복자 주문모 신부
40세 늦은 나이에 사제품
뛰어난 학식으로 문서 선교 힘써
새남터 형장에 끌려가 끝내 순교

 

 

주문모 신부는 중국에서 들여온 「성세추요」를 인준해 주는 등 학식에 밝은 만큼 문서 선교에 힘썼다. 1801년 천주교 서적이 압수돼 소각될 때 「사학징의」에 써 있던 책 목록은 모두 120종 117권이며, 그중 83종 111권은 한글로 기록된 책이었을 정도로 주문모 신부의 문서 선교는 한국 교회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양 떼를 위해 자수한 목자

 

 

1866년 병인박해가 일자 성 오메트르 신부는 성 다블뤼 주교(안토니오·1818~1866)를 찾아간다. 그는 다블뤼 주교와 배를 타고 피신할 계획을 세웠지만 역풍으로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오메트르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거더리에서 체포되자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날 거더리로 와 자수한다. 서울로 압송돼 고문을 받다가 충남 보령 수영으로 이송된 오메트르 신부는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처형장인 갈매못에서 참수형을 받아 29세의 나이에 순교했다.

 

 

복자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해 귀국을 결심하고 황해도 황주까지 도피했지만 마지막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나의 양 떼와 운명을 같이하여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양에 돌아와 자수를 한다. 주문모 신부는 한강 근처의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 죽음을 맞았다.

 

 

주문모 신부의 죽음에 대해 하느님의 종 황사영(알렉시오·1775~1801)은 「백서」에서 ‘목을 베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고 눈부시어,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라고 복자의 순교를 묘사했다.


 

 


◆ 서울 새남터 순교 성지 - 4대 박해 동안 성직자 11명 순교 새남터 순교 성지는 서울시 용산구 이촌로 80-8에 위치한다. 새남터는 예부터 이곳에 무성했던 억새와 나무를 합한 ‘새나무터’의 준말이다. 특히 4대 박해 동안 순교한 성직자 열네 명 중 열한 명이 새남터에서 참수됐다. 신유박해 때 복자 주문모 신부, 기해박해 때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성 앵베르(라우렌시오·1796~1839) 주교, 병오박해 때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안드레아·1821~1846) 신부, 또 병인박해 때 여러 사제 등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박효주 기자 phj@catimes.kr

 

[가톨릭신문 2024-07-19 오전 9:52:09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