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News

  • 전례성사
  • 가톨릭성미술
  • 가톨릭성인
  • 성당/성지
  • 일반갤러리
  • gallery1898

알림

0

  • 가톨릭뉴스
  • 전체 2건

[글로벌칼럼] 로마를 배워야 하는 이유 2024-07-17

미국에는 ‘고양이를 잡고 휘두르면 누구든 맞는다’(You can’t swing a cat without hitting x)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길냥이가 많은 로마에서 이 말은 ‘로마에서 고양이를 잡고 휘두르면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정도로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로마에서 공부하는 신학생들에게 “로마를 배우라”고 줄곧 충고했는데, 아마 여기서 직감을 얻은 것 같다. 역시 이방인이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로마의 모든 거리, 모든 건물, 모든 지역에서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달리 말하면, 딱히 수업을 따라다닐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관심만 기울이면, 로마는 끊임없이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아내와 나는 로마 프라티 지역의 한 건물 뜰에서 열린 멋진 축하연에서 이를 경험했다. 한 거대한 건물의 10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1924년 준공된 이 건물에는 108개의 아파트와 350개의 발코니, 900개의 창문이 있다. 행사에서는 1924년 6월 26일 발행된 신문을 나눠줬다. 신문을 보니, 이 건물이 완공된 후 당시 파시스트로 로마 시장이었던 필리포 크레모네시가 찾아와 건물을 지었던 피오와 마리오 타키 벤투리 형제를 만났다.


이들이 타키 벤투리 가문 출신인 것이 눈에 띄었는데, 당시 유명했던 예수회원인 피에트로 타키 벤투리 신부도 같은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신문이 발행됐던 1924년 6월 24일 피에트로 신부는 이미 베니토 무솔리니와 비오 11세 교황 사이의 중재자로 임명돼 있었다. 그는 파시스트 이탈리아 시절 가장 전도유망하고 힘있는 성직자였다.


1923년부터 1943년까지 피에트로 신부는 교황을 대신해 수십 번 무솔리니를 만났고, 정부의 다양한 기관들을 자주 들락거렸다. 무솔리니와 워낙 가까운 사이여서 로마 시민들은 피에트로 신부를 ‘무솔리니의 고해사제’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무솔리니는 냉담했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보지 않았다.


피에트로 신부는 친정부 인사로 낙인찍혀 1928년 2월 로마의 제수 성당 사무실에 난입한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칼에 목을 찔렸는데, 가까스로 경정맥을 비꼈다. 누가 어떤 동기로 피에트로 신부를 공격했는지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파시스트 정부 시절 가톨릭교회의 역할에 대해 논란을 부추겼다.


분명 피에트로 신부는 무솔리니 정부와 가까웠지만, 그가 역사 앞에서 잘못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미국의 작가 데이비드 케르처는 2014년 저서 「교황과 무솔리니」에서 피에트로 신부를 반유다주의자로 표현했다. 피에트로 신부는 1926년 한 메모를 남겼는데, 그는 ‘유다인과 프리메이슨의 금권 정치’가 교회의 가장 큰 적이라고 썼다.


반면, 보스턴칼리지 교수였던 로버트 알렉산데르 마릭스는 2012년 「파시스트 와인에 유다인 물 붓기」(Pouring Jewish Water into Fascist Wine)라는 책에 피에트로 신부가 이탈리아의 인종법 적용에 유다인은 제외해 달라고 무솔리니에게 44차례 서한을 보낸 사실을 언급했다.


1940년 로마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에서 피에트로 신부는 예수회 창립자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유다인과 유다주의에 호감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6세기 당시 스페인 가톨릭교회에서 이는 지배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게다가 피에트로 신부에게 부여된 주요 임무는 1870년 교황령 붕괴 이후 무솔리니 정부와 교황청의 법적, 재정적 지위에 대해 협상하는 것이었다. 이 노력은 1929년 라테라노 협약으로 이어져 바티칸시국은 독립국으로 주권을 인정받았다.


이런 맥락에서, 교황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한 가톨릭 성직자가 개인적으로 무솔리니와 친분을 쌓았다고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내가 매일 걷던 길에 100년 전에 서 있던 한 전도유망했던 예수회원의 두 친척에서부터 나의 상상이 시작됐다. 두 친척이 피에트로 신부를 자랑스러워했는지, 그의 행보에 당황스러워했는지, 아니면 그로 인해 서로 갈등을 겪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에서 열린 작은 행사를 통해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순간, 여전히 역사적으로 논란이 있는 교회의 활동에 대한 단상이 이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로마의 한 아파트에서 말이다. 이 아파트도 어느 정도 역사성을 지니고 있던 것이다. 로마의 한 아파트를 통해서도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배운다.



글 _ 존 알렌 주니어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소식을 전하는 크럭스(Crux) 편집장이다. 교황청과 교회에 관한 베테랑 기자로, 그동안 9권의 책을 냈다. NCR의 바티칸 특파원으로 16년 동안 활동했으며 보스턴글로브와 뉴욕 타임스, CNN, NPR, 더 태블릿 등에 기사를 쓰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4-07-17 오전 9:12:10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