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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하나되는 구원의 길을 열다 | 2024-0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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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하느님의 나약함이 상처 입은 사람을 보고 함께 고통을 겪으며 상처를 싸매주고 돌보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이라면, 그 나약함은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몸소 인간이 되신 ‘육화’(Incarnatio)에서 절정을 이룬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몸소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에 있다.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의 운명을 당신 것으로 하시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건을 이해하고 있는가? 거기에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이 숨겨져 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이 어디까지 가는지 잘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실 때 인간의 나약함을 교묘히 피하거나 없애지 않으시고 온전히 당신 것으로 하셨다. 인간과 하나 되고자 나약한 인간 본성, 죽을 운명까지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오직 인간을 향한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은 위험을 무릅쓴 사랑, 나약하고 힘없어 보이는 무모한 사랑처럼 보이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로 꽃피우는 놀랍고도 강한 사랑이다. 여기에는 예수님 신원의 신비도 숨겨져 있다.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심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두 본성(인성과 신성) 안에서 혼합되지도 나뉘지도 않는 분으로 고백한다.(「덴칭거」 302항) 이는 예수님의 신성이 그분의 인성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분의 인성 안에서 온전히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모든 것(죄를 제외하고는)을 똑같이 겪으신 분이시다.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 돌봄과 보살핌을 받아야 했으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셔야 했고, 인간 삶의 비참한 처지를 목격해야 했으며, 죄악과 죽음의 현실이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겪으셔야 했다. 죽음과 죽음 앞의 번민, 십자가 위에서 가장 버림받고 모욕당하며 고통받는 처지를 몸소 겪으셔야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신적인 모습(기적·치유·구마·부활 등)만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가엾은 마음·고통·번민·울음·죽음 등)에 주목한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것은 그분의 가장 나약한 인성 안에 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묻는다. 꼭 그렇게 하셔야만 했을까? 인간이 되어 역사 안으로 들어오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인간을 구원하실 수는 없었던 것일까? 하느님 입장이 아니기에 확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의 나약한 인간성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구원의 길을 마련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외적인 모습만을 취하신 것이(이를 ‘가현설 假現說’ 이단이라고 부른다) 아니라 직접 인간이 되시어 인간의 모든 조건, 죽을 운명까지도 당신 것으로 하신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가 인간성 안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고 그분과 하나 되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제 구원의 길은 저 먼 하늘이 아닌, 지금 여기 인간적이고 나약한 우리의 삶, 우리의 몸과 정신에서 출발하여 우리와 똑같이 사신 예수님과 함께 걷고 친교를 이루며 하느님 자녀로 살아가는 것에 있다. 이는 우리의 일상, 특히 병들고 죽어 없어질 몸까지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것으로 취하신 몸이며 육이기에 거룩하고 고귀한 것이며, 구원으로 가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자신을, 각자의 나약함을 신앙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면 어떨까? 한민택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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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4-07-17 오전 7:52:07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