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카파도키아의 판잘리크 계곡에 있는 ‘판잘리크 수도원 석굴 성당.’(pancarlik kilise church)
이 수도원 성당은 성 테오도로에게 봉헌됐다.
네 개의 복음서가 세상에 모습을 모두 드러낼 즈음(2세기), 그리스도교는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서서히 몸집을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일반 신자들과 달리 독특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독특한 삶에 대한 내용이 서기 100년 후반기에 작성된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Epistle to Diognetus : 익명의 저자가 귀족 가문 출신 디오그네투스에게 쓴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육체를 위해서만 살지 않는다.
그들은 이 땅 위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그들은 법률에 순종하면서도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는 그 법률을 넘어서려고 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박해 받는다.
그들은 가난하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만든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모든 것이 풍족하다.”
육체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삶, 모든 사람을 사랑하나, 모든 사람으로부터 박해받는 삶,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모든 것이 풍족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 우리가 오늘날 ‘수도자’라 부르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교회에 왜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생겨났을까.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가정도 꾸리지 않고 독신의 삶을 살아가게 했을까.
여기서 먼저, 용어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라틴어에 ‘비타 콘세크라타’(Vita Consecrata)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오늘날 번역에서 ‘봉헌 생활’과 ‘축성 생활’로 혼용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글에서 그냥 ‘수도 생활’이라고 적고자 한다. 축성 생활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의 삶이라는 ‘수동적 의미’가 강하고, 봉헌 생활은 수도자 개인의 의지를 강조하는 ‘능동적 의미’가 짙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는 ‘수도자’라는 표현이 자리 잡고 있는 만큼 그들의 생활을 ‘수도자들의 생활’이라고 단순화시키는 것도 크게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수도 생활의 기본 요소인 독신 생활의 기원은 참 오래됐다. 이와 관련해 신뢰할 만한 내용이 엘리자베스 애보트(Abbott Elizabeth)의 「독신의 탄생」(이희재 옮김, 해냄, 2006)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옮겨본다.
“고대 그리스의 여제관은 대개 처녀였다. 혼인한 적이 있는 여자도 경우에 따라서는 여제관이 될 수 있었지만, 그들도 예외없이 여제관이 된 후에는 금욕과 독신을 지켜야 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금욕이라는 이상적 가치가 존중을 받았으며,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같은 철학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신(神)을 대리하는 직책을 맡은 이들은 독신을 지켜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류의 머릿속 한 귀퉁이에는 독신이 고결하고 숭고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선택받은 자’ ‘고결한 자’는 욕망을 거슬러 더 높은 차원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인도에서도 독신과 금욕을 기반으로 하는 수도승 생활이 오래전부터 있었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불교의 수도승 생활이 여기서 파생되어 나왔다. 헬레니즘(B.C. 323~146년 사이의 고대 세계에서 그리스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시대)적 사고에서도 ‘아스케시스’(ασκησι?, 작은 욕망을 가지는 연습 및 훈련), ‘아나코레인’(αναχωρειν, 금욕, 인간적 욕구를 끊는 것), ‘에레미아’(ερημια, 은둔) 등은 특별히 가치 있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금욕과 독신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이러한 생각은 로마 시대로 이어졌다. 비슷한 시기 로마 제국의 동쪽 끝 이스라엘의 유대교에서도 독신과 금욕을 최전선에 세운 종파가 급부상했다. 우리는 그 종교적 공동체를 ‘에세네파’라고 부른다.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n, B.C. 20?~A.D. 45?)가 남긴 「현자」라는 책에 그들의 삶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스스로를 모세의 형 아론의 후손이라고 지칭했던 이들은 ‘난 너희와 달라!’라는 자긍심이 대단했다.
자! 여기서 ‘난 너희와 달라’라는 말이 나왔다. 다르기 위해선 스스로 뭔가 특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수준 낮은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겠는가. 에세네파는 하느님을 더 충실히 따르기 위해 사람들의 거주처를 떠나 사막으로 갔다. 스스로를 세속과 분리시킨 것이다. 그들은 사막에서 동굴을 파고 살면서 금욕을 지켰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선택받았다고 자부한 그들은 노예도 부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노동해야 했고, 그 노동의 결과는 공평히 나눠 가졌다. 식량이 부족했던 탓에, 식사는 하루에 두 번 소박하게 했다. 이들은 단 한 벌의 옷만 입었다. 이들 에세네파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낯익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튀르키예 중부 카파도키아 파샤바(Pasabag)의 성 시몬 수도원 성당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수도 생활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속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점, 목욕할 때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것조차 불편하게 여겼을 정도로 금욕을 강조했다는 점, 음식을 소박하게 먹었다는 점, 공동 노동을 바탕으로 공동 경제 생활을 했다는 점 등은 모두 가톨릭 수도원 공동체의 삶과 맞닿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 수도 생활이 에세네파에서 직선적으로 바통을 이어받은 하강 뿌리 역사 구조의 산물인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수많은 뿌리가 수렴되어 하나
의 줄기로 올라가는 상승 열매 구조다. 즉 가톨릭 수도 생활은 에세네파 등 다양한 구약 전통에, 세례자 요한의 광야 생활(마태 3,1; 11,7-10), 예수 그리스도의 40일간의 광야 생활(마태 4,1-11) 등에서 복합적으로 영양분을 흡수하고 자라난 나무다.
이러한 다양한 전통을 바탕으로 초기 교회에 이미 자연 발생적으로 금욕자(Ascetae)와 동정녀들(Virgines)이 출현했으며, 박해가 한창이었던 3세기 말에 벌써 그 금욕자와 동정녀들을 위한 조직적 형태의 수도 생활이 나타났다.(신약성경과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에 나타난 독신 및 금욕 생활에 대해서는 마태 19,12 ; 1코린 7,25-34 ; 사도 21,9 ; 1티모 5,9-16 참조) 이러한 수도 생활에 대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는 디다케(Didache), 로마의 클레멘스가 코린토 공동체에 쓴 편지,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등이 있다.
이제 우리는 알았다. 수도 생활이 당시 사회 문화와 다양한 역사적 전통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수도 생활 태동의 모든 것이 곧바로 설명되지 않는다. 왜 탄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가능하지만,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물이 있다고 해서 생명체가 저절로 탄생하지 않는다. 물은 생명체에 있어서 필수 조건이지만, 충분 요건은 아니다. 수도 생활을 태동하게 한 동력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 맨 앞줄에 성 안토니오가 있다.
글·사진 _ 우광호 (라파엘,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