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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김영섭 건축가 | 202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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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지망생에서 건축학도로 서울대 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덕수궁에서 열린 전국 어린이 사생대회에서 한참 동안 석조전을 그리고 있었는데, 왔다 갔다 하던 감독관 두 분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더라고요. 그러더니 갑자기 중지하라고 말하며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림을 압수했어요. “어떻게 어린아이가 투시도법으로 건물을 그리냐? 이 그림은 어른들이 미리 그려준 것이니 부정행위다”라면서요. 뒤늦게 행사장에 따라온 모친께 실격이라고 외치는 모습이 마치 어제의 일인 것처럼 떠오르네요. 그 일은 내게 큰 트라우마가 되어 그림 그리기를 회피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어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잘못된 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초등학교 첫 수업시간에 ‘학교 오는 길’이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으로 크게 칭찬받은 기억마저 머리 속에서 지워지기 시작했어요. 경복중 2학년 사생대회 때 전영화 미술 선생님이 “넌 기성 화가처럼 스케치가 생생하구나. 아주 잘 그리네!” 하고 칭찬해 주셔서 다소 상처가 회복되었고, 동성고 1학년 때는 전교생 미술대회 최고상을 차지하여 교장 선생님과 김형구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그림을 그릴 운명이고 화가가 될 것이다”라고 미래를 예시 받기도 했습니다. 김형구 선생님은 미술을 전공하기엔 집안 사정이 어렵다는 호소에도 내게 유화 물감과 이젤, 붓과 팔레트를 사주고, 당신의 혜화동 화실에서 유화를 가르쳐 주셨고, 더 나아가 계동의 친구 화실에 데리고 가서 무료로 과외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어요. 나중에 혹 내가 선생님이 되면 학생들에게 최선의 배려와 호의를 베풀어야겠다는 마음은 그때 생긴 것 같아요. 서울대 미술대학에 지원했는데, 입시에서 제시간에 과제를 내지 못해 실패했어요.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염색 보세가공회사에 들어가 일본전통의상 염색디자이너로 직장생활을 했어요. 2년여 후, 1970년 성균관대 건축공학과 1기로 입학했고요. 당시는 주임교수도 없을 때였어요. 1970년대 초 민주화운동 여파로 학교는 휴교를 반복해서 실제 수업일수는 3년제 대학에 다닌 것과 마찬가지였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2학년 때 윤동주 시인의 동생인 윤일주 교수님이 첫 주임교수로 부임하셔서 건축이론과 함께 시, 미학을 배울 수 있었어요. 서울대 김태 교수님으로부터 데생과 크로키도 배웠고요. 교회의 배려로 많은 성당 설계 교회 건축의 첫걸음은 군 복무시절 육군 제25사단 비룡성당이었어요. 육군 제3사관학교 복합종교시설인 충성당도 설계했고요. 1979년에는 서울 홍제동성당 내부 개수공사를 설계했고, 1981년에는 조선교구설정 150주년 여의도기념행사장을 맡았어요. 계속해서 1982년 형과 함께 서울 정릉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도원과 성당을 지었고, 서울 신천동성당과 서울 여의도성당을 설계했어요.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집전하신 여의도 103위 시성식 식장의 설계도 의뢰받았어요. 교황청과 청와대 경호실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사제단이 있는 양측단을 낮추도록 지시했어요. 신부님들로부터 중앙 제단을 볼 수 없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지요. 동시에 교황님의 방문예정지인 명동대성당의 건물기능 회복을 위한 구조안전진단과 성당 내부보수 및 냉난방 공사를 추진했는데, 당시 33살의 젊은 건축가에게는 막중한 부담과 책임으로 다가오기도 했어요. 교황 방문 이후에도 형과 함께 서울 논현동성당, 당산동성당, 수유1동성당, 방배동 성당을 설계했어요. 1988년 독립을 한 후에는 교회건축 작품 경향을 기존의 조적조 절충양식에서 벗어나 현대건축 양식과 새로운 신학을 반영하는 교회 내부고간 조성을 추구했어요. 서울 잠원동성당을 개수하면서 빛을 도입을 최대화했고요. 하지만 삼성산성당을 끝으로 서울에서의 성당 작업은 멈추게 됐어요. 이후 지방 교구의 요청에 부응해 수원교구 안양 중앙성당과 발안성당, 대전교구 금산성당과 청양성당, 줄무덤성지, 춘천교구 강릉 초당성당, 의정부교구 파주 다율리성당 등을 설계했어요. 수도원 건축으로는 1983년 서울 수유동 가르멜 수도원을 비롯해 1989년 보혈선교수녀회,서울 오류동 예수 수도회 수련소 등을 설계했고요. 이외에도 가톨릭대 성신교정 본관과 도서관을 설계했는데, 영광스럽게도 김수근 건축상을 받았어요. 가톨릭대 성심교정 국제학사인 안드레아관도 지었고요. 마산교구 함안성당이 구한선(타대오) 복자 성지조성을 마지막으로 교회일과 함께 모든 건축 작업을 마무리했어요. 성당은 기도하는 집 돼야 젊은 날의 신앙심과 교회의 배려로 교회 건축에 발을 내딛게 되었지만, 지나온 과정 내내 포기하고 싶은 내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어요. 많은 오해와 갈등, 배척, 소외 등을 경험했고요. 그러면서 6·25전쟁 전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으면서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 영명해 주신 하느님의 은총과 역사하심을 내내 묵상하게 됐어요. 이 묵상과 기도에 힘입어 여러 위험한 순간들을 지나쳐 왔고요. 그럼에도 우리 믿는 이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크게 꾸짖으시며 우리에게 내려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은 하느님의 집, 기도하는 집이다.’(Domus Dei Domus Orationis) ◆ 김영섭(시몬) 건축가는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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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7-10 오전 8:52:09 일 발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