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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8)] 안성성당 : 일제강점기의 교회 2024-07-10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국내 선교는 더욱 활성화됐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자유로워진 것은 물론이고, 조선인 사제들도 지속적으로 양성되면서 1910년에는 전국에 본당이 58곳으로 늘어나기까지 했다. 그런 가운데 조선 사회에는 큰 사건이 발생한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 일제강점기의 교회


1904년 한일의정서, 1905년 을사조약에 이어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일제가 강제로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은 주권을 잃어버리게 됐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조선을 식민 통치하기 시작했다. 한일합병조약이 공표된 당일 데라우치 마시타케 통감은 ‘유고’(諭告)를 발표했다. 식민 통치에 관한 다양한 내용이 담긴 유고에는 종교에 관한 내용도 있었는데, 총독부의 방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가 선교하는 것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특히 일제는 그리스도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선교사들과의 마찰이 선교사들의 본국과의 외교 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선교사 명의로 된 교회 부지, 주택 등의 소유권을 보장하고, 교회에 면세 특권을 부여하는 등 교회에 편의를 제공하면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한 교회의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한국교회 선교사들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아들였다. 1907년 프랑스 정부가 일제의 식민 통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이었던 선교사들도 모국의 외교 정책에 따랐던 것이다. 일제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선교사들은 정치 불간섭주의를 표방했다. 교회나 신자들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지배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이었다. 일제와의 마찰을 피함으로써 교회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교회 지도층은 일제강점기 내내 이런 입장을 고수했고, 일제에 저항한 신자나 성직자들을 엄하게 다스렸다.



■ 학교를 설립하다


한국교회 지도층은 일제에 대한 저항을 금지했지만, 신자들, 그리고 신자들 곁에 함께하는 사제들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대표적인 활동이 애국계몽 활동이었다. 교육을 통해 조선인들을 일깨우고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워준 것이었다. 당시 일제는 일제에 충성하는 식민지 교육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을사조약 이후 학교를 세우고 치외법권을 내세워 일제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학교를 운영해 나갔다.


안성본당 초대 주임으로 사목하던 하느님의 종 앙투안 공베르 신부가 세운 사립공교(私立公敎) 안법학교도 이 시기 세워진 학교다. 공베르 신부는 1909년 1월 안법학교를 설립했다. 안법학교는 오늘날 안법고등학교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공베르 신부가 학교를 설립한 것은 교육기관을 필요로 하는 지역사회에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공베르 신부는 교육기관을 운영하는 것이 선교에 도움이 되리라 여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공베르 신부만이 아니었다. 여러 선교사들이 교육기관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런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제하고자 나섰다. 일제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고, 「사립학교규칙」을 시행했다. 일제는 학교의 설립, 유지, 교원의 인사를 인가받고, 교원 이름과 교과목, 재적 학생, 교과서 등을 신고하도록 했다. 또 1915년에는 이 규칙을 더욱 강화해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기는 경우 강제로 학교를 폐쇄시켰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학교 설립을 포기하지 않았다. 수원본당(현 북수동본당)을 사목하던 하느님의 종 데지레 폴리 신부는 1934년 소화강습회를 열었다. 아직 본당의 성당도 채 건축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폴리 신부는 먼저 강습회를 열고 일제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에게 일본어가 아닌 한글을 가르쳤다. 폴리 신부의 소화강습회는 오늘날 소화초등학교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 3·1운동에 함께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교회 지도층은 만세운동 참여를 금지했다. 서울대목구 뮈텔 주교는 만세운동을 하려는 신학생들을 막았고, 그럼에도 독립 만세를 외치던 신학생들에 대한 징계로 그해 서품식을 거행하지 않았다. 대구대목구 드망즈 주교도 만세운동에 참여하려는 신학생들을 만나 참여하지 말도록 경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교회 지도층은 3·1운동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신자들 곁에 머물던 선교사들은 신자들의 3·1운동을 지지하며 적극 도왔다. 그런 대표적인 선교사가 안성본당의 공베르 신부다.


3·1운동 당시 안성지역 사람들은 공베르 신부를 찾아와 만세운동을 어떻게 전개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다. 공베르 신부는 이미 다양한 활동으로 신앙유무를 막론하고 지역 사회 안에서도 존경을 받는 유지였기 때문이다. 공베르 신부는 “낮에는 국기를 들고 밤에는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조언하면서 질서 있게 만세운동을 지휘할 수 있는 지도자로 천주교 신자를 추천하기도 했다.


또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폭력은 일본군의 더 큰 폭력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폭력과 파괴행위를 하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동시에 일본군에게 박해중지를 요청하기도 했다.


만세운동 중 일본군의 진압이 시작되자 공베르 신부는 사람들을 보호했다. 일본군에 쫓긴 군중이 안성성당으로 몰려오자 공베르 신부는 성당 마당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이곳이 치외법권임을 주장하면서 일본군의 진입이 국제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다며 일본군을 막아섰다. 공베르 신부는 직접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지는 않았지만, 3·1운동에 참여한 우리나라 국민들을 돕고 보호하며 함께 했던 것이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가톨릭신문 2024-07-10 오전 8:52:08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