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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함과 사랑을 통한 구원 2024-07-10



사도신경에서 하느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나약하신 하느님’은 적절치 못한 표현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는 힘에 대한 환상을 깨고 나약함에 대한 신앙의 통찰을 자기 것으로 할 필요가 있다.

“나의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필자가 사제수품 성구로 이 구절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의 약점을 깊이 인식하면서도 약함을 통해 강하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깨달은 바오로 사도의 영적 통찰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눈에 똑똑하고 힘 있는 사람이 아닌, 자신을 나약한 존재로 인정하는 사람을 통해 당신 일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최근 신학자들은 인간의 나약함(vulnerability)에 다시금 주목한다. 이 나약함이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새로운 이해와 새로운 윤리적 토대를 마련해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교황청 문화평의회, 「필요한 휴머니즘을 향하여」,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23, 48-55 참조) 이에 따르면 나약함은 상처를 입었음이 아닌, 상처를 입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곧 상대에게 열려 있고 관심을 기울이며 심지어 상처 입을 위험까지도 감수하는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루카 10,29-37 참조)처럼, 강도를 만나 상처를 입고 초주검이 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따라서 나약함은 불안정함이나 무력함보다는 민감함이나 포용력에 더 가깝다. 이 나약함이 인간을 서로 알아보게 하고 윤리적 삶을 가능케 하는 바탕이라고 보는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나약함을 지니고 있었기에 상처 입은 이에게서 요청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타인의 처지를 자기 것으로 느낄 수 있었으며(‘가엾은 마음’),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도와 살릴 수 있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상처 입은 아담을 위해 당신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주신 예수님이시며, 아드님과 함께 사랑 자체이신 당신 존재를 인간에게 내주신 하느님 아버지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약하신 하느님’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나약하신 분이신가? 그렇다. 하느님 아버지의 나약함은 죄악으로 인해 고통받고 상처 입은 인간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고, 몸소 인간이 되어 오심에서 나타난다. 당신 외아들 예수님에게서, 특히 그분의 ‘가엾은 마음’에서 아버지의 나약함이 나타난다. 나병 환자를 보고,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고, 목자 없이 길 잃은 양 떼 같은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그분은 그들에게 다가가 고쳐주시고 살려주시고 먹여주셨다. 착한 사마리아인이신 예수님은 상처 입은 인류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인간을 살리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와 돌보고 보살피시며 정성을 기울이는 하느님이시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지 않으신가? 이제 우리는 나약함과 사랑에서 전능하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죄와 악이 난무하는 세상을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지 않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힘이나 폭력이 아닌 나약함과 사랑을 통해 구원하신다. 당신 아드님의 나약함과 사랑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는 죽음을 쳐 이기시고, 인간에게 불멸의 희망을 안겨주시며, 당신 자녀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를 통해 그 일을 지속해 가신다. 오늘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하느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 이 나약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몸소 실천할 수 있기를 청해보면 어떨까.





한민택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4-07-10 오전 7:52:03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