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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보내주십시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장자호 신부(상) | 2024-0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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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국제(외국인)본당 주임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장자호 신부(요한 가롤로·82)가 한국에 온 지 55년이 됐다. 고(故) 범덕례(프란치스코 팔다니) 신부를 따라 한국에 와 선교한 세 조카 사제 중 한 명이었던 장자호 신부. 1969년에 이미 지구인이 달나라도 갔는데 자신이라고 선교지는 못 가겠나 싶었다는 당찬 그의 생애와 한국 생활, 선교 사제로서의 사목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작은아버지 따라 선교 사제가 되다 “어릴 때부터 선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장자호 신부는 1942년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 근처의 시타델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장 신부는 그가 네 살쯤일 때 중국으로 선교를 떠난 작은아버지 범덕례 신부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또 초등학생 시절 주일학교를 가면 본당 신부님이 전교 잡지를 자주 보여줬다. 덕분에 그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선교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장 신부는 1967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그는 결국 바람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자원은 받지만 수도회 차원의 계획이 우선시 되는 상황이었기에, 당시 관구장은 장 신부에게 아르헨티나에 갈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한국에 파견돼 있던 범 신부는 우연히 총본부 모임을 위해 한국을 떠나 관구장을 만나게 됐고,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니 조카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범 신부의 부탁을 통해 장 신부는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호랑이 아들 ‘장자호’ 외국인 선교 사제가 한국에 오면 한국 이름을 만들곤 한다. 장 신부의 본명은 잔카를로 팔다니(Giancarlo Faldani). 1969년 한국에 와서는 이름의 시작인 ‘잔’과 비슷한 ‘장’을 성으로 삼아 장 신부가 됐다. 그런데 첫 본당 보좌 신부로 갔을 때 할머니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범 신부님이 장 신부님 작은아버지라는데 어떻게 성이 다르지?” 이 말을 전해 들은 범 신부는 장 신부의 이름에라도 자신의 성을 넣자며 호랑이의 아들이라는 뜻의 ‘자호’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래서 장 신부의 별명은 ‘호랑이 새끼’가 됐다. 군부 탄압을 견디다 한국에 와서 30년간은 부산교구, 대구대교구, 인천교구에서 각각 10년씩 본당을 맡아 사목했다. 주임신부로 있던 부산 대연동본당 옆엔 오륙도 나병환자촌이 있었는데 그 환자들의 자녀들을 수도원으로 데려와 돌보기도 했다. 아이들과 같이 놀고 생활하는 일이 참 보람 있었다. 장 신부는 한국에 그늘져 있던 군부의 탄압도 받았다. 특히 초대 원주교구장을 지낸 고(故) 지학순 주교(다니엘·1921~1993)가 1974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유신헌법은 무효’라고 양심선언을 발표한 뒤 체포됐을 때,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시국미사에 참석했다가 사진이 찍힌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장 신부가 본당에서 강론할 때면 형사가 와서 감시하곤 했다. 장 신부는 “아마 강론 내용도 모두 녹음해 갔을 것”이고 말했다. 행정상의 불이익도 받았다. 한국 체류 기간을 연장하러 기관에 가자, 직원은 이 서류, 저 서류를 다 요청하며 절차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도 겨우 6개월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일을 보고 담당 직원과 단둘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장 신부가 절차를 왜 이렇게 어렵게 하냐고 직원에게 묻자, 직원은 그의 이름에 반동분자라는 표시가 있어서 그랬다고 몰래 알려줬다. 강산이 다섯 번 변한 한국 “언젠가는 매년 두세 번 있던 세례식 때 100명 이상씩 영세를 준 적도 있죠. 내가 잘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한국을 많이 축복하셨어요.” 장 신부는 한국교회 성장의 산증인이었다. 그가 입국했을 즈음인 1970년 신자 수는 약 79만 명이었지만 현재 신자 수는 600만 명에 육박한다. 특히 1980년대에는 한해 약 7%씩 신자 수가 늘었다. 그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발전도 몸소 겪었다. 장 신부가 부산교구에 있던 1969년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야 했는데, 그때만 해도 경부고속도로가 서울-대전만 개통됐을 때였다. 부산에서 대전까지 비포장도로를 트럭으로 운전해 오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 그땐 서울에서도 강남은 논밭인 상황이었다. 2000년 대희년에 서울 국제본당으로 옮긴 장 신부는 외국인을 위한 새로운 본당에서 그의 사목 생활을 시작했다.<계속> 박효주 기자 phj@catimes.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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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7-09 오후 6:12:07 일 발행 ] |